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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 10 [군필자 복학생에게 기회를 주자!] [내부링크]

전편 - [지구는 살아있었고, 엇박자 복학은 안된다!] (링크) 내가 교직이수(교직과정) 대상자로 선발된 세 번째 이유는 좀 길다. (일단 여기서 직업병을 발휘하여 배경을 소개한다.) 'TOEIC', '수학의 정석2(고등학교 자연계 수학)'을 기본 수험서 삼아 후퇴는 없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다. (사실 공부만... 한 것은 아니겠지ㅎ) 2005년 3월, 나름 복학생이라 목소리 내며 대학생활 시즌2를 시작했다. (신입생과 동학년 후배는 복학생에게 별 관심이 없었기에 복학생끼리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었다ㅎ) 여기서 소기의 목표를 세운다. '장학금 한 번 받아보자.' 목표 달성을 위한 방법은 간단명료하다. 전 과목의 학점을 잘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를 잘~ 해야 하는 것이겠지. (말은 쉽다ㅎ) 1학년부터 2학년 1학기까지 나는 등록금을 기부(?)했었다. '닥쳐라! 그냥 되는대로 한다! 닥치고 공부다!' 일단 재수강과 계절학기를 통해 학점 세탁을 진행하는 추가 미션도 있었다. 이 시

소방공무원 [9급 공개채용 - 그리고 '학벌세탁'] [내부링크]

생각해보면 물수능으로 포항에서 서울까지 도망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서울에 '이모'가 계셨기 때문이다. (남자라 걱정이 덜했기도 했겠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모가 계셨기에 비교적 안심이 되셨을 것이다. 나름(?) 연고지였던 '마들역', 절묘하게도 숭실대에서 7호선만으로 심플하게 오갈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비교적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고, 자칭 숭실대 의대 5~6학년이라 말하며 다녔던 백수시절에는 한동안 얹혀살았던 적도 있었다. 당시 이종사촌 동생이 두 명 있었는데, 함께 보낸 시간과 기억이 있어서인지 나와 나이 차이가 제법 나긴 하지만 거리낌 없이 지내고 있다. 오늘은 이종사촌 동생 1호의 사례를 꺼내보려 한다. 나름(?) 연고지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 1536 가로판매대 이 블로그의 체크인 이 친구의 꿈은 제복을 입은 공무원(경찰, 소방)이 되는 것으로 비교적 명확했다. (다만 군인은 생각하지 않았다ㅎ) 그리고 경찰대 진학을 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아무것도

지난날 - 11 [시험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내부링크]

전편 - [군필자 복학생에게 기회를 주자!] (링크) 2007년 황금돼지의 해(출산율이 해가 갈수록 저조하다꼬 나라에서 돈을 쏟아부어가며 난리를 직이던 와중에 잠깐 출산율이 솟아오른 일시적인 해이다.),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목표는 그해 12月에 있는 국공립학교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을 통과하는 것으로 분명했다. 교직이수(교직과정)를 먼저 경험하거나 교육대학원에서 교원자격증을 취득한 선후배들은 하나같이 '첫 번째 시험은 경험 삼아 보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 나름대로 독기를 품은 채 철저한(?)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주변의 선후배들이 했던 그 말이 싫었기에 '한 번에 끝낸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그러나 시험장(舊 팔달공업고등학교 -> 現 수원하이텍고등학교)의 분위기는 내 생각과 달리 치열했다. 내가 입실했던 고사장에는 결시생 3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인구밀도가 높았다. (뭐 문제 잘 풀고 답만 잘 쓰면 되지. 이런 안일한 생각을 했다.) 빡빡한

지난날 - 12 [변화는 선택이 아이다! 생존이다!] [내부링크]

전편 - [시험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링크) 한 해가 지난 2008년, 자동으로 백수 대열에 합류했다. 생각해보니 지난 1년간 공부(?)를 하는 흉내를 내기만 했지, 기본생활습관과 자기관리가 엉망이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은 산적(山賊 - bandit)이었고, 무절제했던 식습관에 몸무게는 90kg을 돌파했었다. (대학교 졸업 직전의 사진을 남겨 놓지 않은 게 다행이다ㅎ 몇년 후 뒤늦게 발견한 그 당시의 사진을 불로 태운 적이 있다.) 이 시점에서 변화는 선택이 아닌 생존이었다. 진양철 회장도 말했다. 변화는 선택이 아이다! 생존이다! 변화의 목표는 간단했다. 규칙적으로 하루를 살고, 체중을 줄이는 것이다. 대학교 4학년 시절, 11:00수업 직전까지 숙면을 취하고 늦은 점심식사 시간에는 나에게 식신(食神)처럼 뭐든지 흡입하던 용감함이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반주(飯酒)와 야식이 없는 날에는 야만성(?)을 보이기도 했었다ㅎ 헬스장 연간 회원 등록은 생존에 따른 패키지 상품이

지난날 - 13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내부링크]

전편 - [변화는 선택이 아이다! 생존이다!] (링크) 대인기피증 정도는 아니었지만, 공부(?) 하는 백수였기에 스스로 주변의 시선을 따스하게 느낄 수 없었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백수가 심리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름 공부, 운동으로 예전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몇 달 동안 유지하다보니, 조금씩 짐승에서 사람으로 변태해가는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긴(?) 있었기에 누가 내 근황을 궁금해하면, '이제 사람답게 살아볼라 캅니다!'라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곤 했었다. (막상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았다ㅎ) 농담으로 내가 허각(?)처럼 변했으면 인생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ㅎ 양질(?)의 교사를 선발하기 위해 시험 제도를 불가피하게 변경한다는 당시 교육과학기술부(現 교육부)의 취지 덕분에 2008년 6월 무렵,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 모의평가를 시행한다는 공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의평가 응시 신청은 했는데, 응시자는 무작위 선정이라 막상 시험장에 가

지난날 - 14 [2009년, 마지막 도전] [내부링크]

전편 -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링크) 결과적으로 보자면, 나에게 있어서 2008년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2009년이 시작됐다. (시간 잘~간다. 군입대를 앞둔 2002년 어느 날 '장동건' 주연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영화 포스터를 슬쩍 봤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시점이 영화 속 그 2009년이라니 믿기지 않았다ㅎ) 자취방에 처박혀 약간(?)의 히끼꼬모리 증세를 보이고 있던 내게 엄마가 찾아왔다. 현실을 직시하는 말 한마디로 대화는 시작됐다. 먼 옛날 언제고 싶었던 2009년이 진짜 오긴 왔었다ㅎ 엄마 : 우짤끼고? 나 : ('사람인' 등의 구직 사이트를 디비고 있었다.) 모르겠다. 어디 취직해야 안되긋나 싶다. 엄마 : 누가 니 데꼬 간다카나? 나 : (마우스 클릭, 스크롤 소리를 내며) 모른다. 엄마 : 1년 더 시험 공부한다 캐가 합격이 보장되는 것도 아이고, 우째야 되긋노? 진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2009년에는 시험에 합격해가꼬 어딘가에 신규

방재안전직 공무원 [9급 공채] [내부링크]

아마 보통 사람들은 공무원이라고 하면 '도청, 시청, 구청, 동사무소, 읍/면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경찰, 소방'처럼 그 특수성이 눈에 띄는 직렬은 '직렬'이라는 용어보다 '우리 세금으로 월급 받는 봉사직(?)'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방재안전직, 생소한 직렬이다. 나 또한 외사촌 동생 4호가 이 직렬에 합격하기 전까지 이 직렬의 존재조차 몰랐었다. 방재안전직(防災安全職) : 기술직 공무원으로서 주로 재난 및 안전업무를 담당한다. (중략) 재난담당자의 장기재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재안전직을 신설하게 되었다. (나무위키 링크 참고) 재난 및 안전업무를 담당한다. 장기재직(?)이 가능하다고 한다. 오늘은 외사촌 동생 4호의 사례를 소개하려 한다. 경북도립대학 소방방재과에 '장학생 특채'가 있던 시절, 이를 위해 나름 인생을 투자했었던 이종사촌 동생 1호의 사례(링크)가 있었기에, 외사촌 동생 4호는 이를 보고 언니(이종사촌 동생 1호)의 모범적인

강철전사의 기억 - 1 [포항제철 아톰즈 축구단, 포철축구전용구장] [내부링크]

1968년 4월 1일 월요일, 남들은 평범한 만우절이라 생각할지 모르는 이날은 포스코(舊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 '포철')의 창립일이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을 실현시키기 당시 위해 '영일만(迎日灣)'의 작은 어촌 '포항(浦項)'에 인생을 바쳐 '철강도시 포항'을 만든 장본인(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누가 뭐래도 이 분(박태준)이 지금의 포항을 있게 해 준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분은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는 선구안적인 사고를 실행함으로써 철강도시 포항을 대한민국 축구의 메카로 만들어 버린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아마 이 분의 선택과 결정이 없었다면, 아마도 2002년 FIFA 한일월드컵은 일본월드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축구는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뒤에 후술한다.) 그것은 바로... 포항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의 창단이다. (전두환 정권이 프로축구를 출범시키기 전부터 포항을 연고로 하는 축구팀이 있었던 것이다.) 대한중석 축구단

강철전사의 기억 - 2 [포항 아톰즈타기 (국민학교) 축구대회] [내부링크]

Super Sonny 손흥민이 태어난 1992년, 포항시(당시 영일군 포함)에는 아주 특별한 축구대회가 있었다. 당시 '포항제철 아톰즈(現 포항 스틸러스)' 축구단에서 주관하는 '포항 아톰즈타기 (국민학교) 축구대회' 이는 포항시(영일군 포함) 소재 전(全)국민학교 (남자) 축구 토너먼트 대항전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관련 정보나 사진이 없어 아쉽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체계적인 훈련은 없었다. 그냥 대회 몇 달 전부터 학교에서 공 좀 찬다는 6학년 남학생을 집합시켜서 방과후, 주말에 연습시켜가꼬 (대진 토너먼트 추첨 전후에) 다른 학교와 친선경기 몇 번 해보고서는 바로 대회 시작이었다. 1992년은 원년대회로써 의미와 동기부여가 컸을 것이다. 당시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으니 먼발치에서 행님들이 공 차는 모습을 구경만 했었다. 인터넷, 스마트폰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그 시절, '행님들이 결승전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장소가 포철축구전용구장이다.'라는 정보를 어떻게 접했는지 그

강철전사의 A매치 철학 - 1 [1992년 다이너스티컵 결승] [내부링크]

행님들의 아톰즈 타기 축구대회를 보며 나름의 꿈과 재미를 키우던 시절, 우연히 TV에서 본 이 경기로 인해 국가대항전 축구(A매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마도 상대가 '일본'이었기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던 것 같다.) 기억을 되살린 결과는 1992년 8월 29일 토요일, 엄마 몰래 갖고 있던 몇백원으로 군것질을 하러 어느 수퍼에 드가가꼬 뭘 살지 고민 중이었던 것 같다. 실컷 고민하다가 새콤달콤(그때는 200원이었다.) 하나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돈을 꺼내려 했는데, 가게 사장님께서는 TV의 축구 중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해설진의 멘트에 따르면 그 경기는 '1992년 제2회 DYNASTY CUP 결승전(링크)'이었다. 상대는 일본. 지금의 한일전 A매치에도 경기 결과에 따라 감독이나 주요 선수에게 칭찬과 비난의 메시지가 난무하는데, 그 시절에도 한일전 분위기는 치열했다.) 새콤달콤은 뒤로하고, 나도 가게 사장님처럼 TV를 바라보고 있었고, 전반 32분 '정재권

강철전사의 A매치 철학 - 2 [1994 FIFA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4차전 (對 일본)] [내부링크]

한국축구 팬으로서 잊을 수 없는 경기이다. 여기서 반드시 직업병을 발휘해가꼬 당시의 상황을 약간(?)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94 FIFA 미국월드컵은 24개국 참가 체제였다. 그 당시에는 개최국(미국), 직전 월드컵 우승국(독일)이 자동출전권(자동티켓)을 확보한 시점이라 6개 대륙에서 24장 - 2장 = 22장의 출전권(티켓)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런데 22장 중 아시아(대륙)에 배정된 출전권(티켓)은 단 2장이었다.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부터 32개국 참가 체제로 진행된 이후 아시아에는 3.5~5.5장의 출전권(티켓)이 배정되었기에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10회 연속진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2장의 주인공을 가리는 방법은 (1차 예선을 통과한) 6개국을 대상으로 한 2차 예선-단판 풀리그(Single Round Robin)이며, 상위 2팀이 월드컵에 진출하는 간단명료한 방식이었다. 보통은 이를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이라 불렀고,

강철전사의 A매치 철학 - 3 [1994 FIFA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5차전 (對 북한), 도하의 기적] [내부링크]

전편 - [1994 FIFA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4차전 (對 일본)] (링크) 1993년 10월 28일 목요일, (미리 말하자면 대한민국 축구사의 3대 기적 중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난 날이다.) 1994 FIFA 미국 월드컵 진출 여부가 결정되는 운명의 날이 밝았다. 상대는 북한. 그리고 최종예선에 참가한 6개국 모두 4차전까지 마친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닥치고 다득점 승리 후 타구장의 결과를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승점 체계(승리 - 2점, 무승부 - 1점, 패배 - 0점)는 지금과 약간 달랐지만, 미국 월드컵에 진출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다득점 승리와 타구장에서의 경기 결과(사우디아라비아, 일본이 동시에 승리를 거두면 안 된다.)였다. '히혼의 수치(링크)'와 같은 승부조작을 차단하기 위해 5차전의 세 경기는 동시에 킥오프가 진행되었다. 이라크 對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對 이란 대한민국 對 북한 마지막 경기의 목표는 분명했다. 그러나... 넘치는 의

강철전사의 U-20 철학 - 1 [1997 FIFA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말레이시아] [내부링크]

매 홀수년도마다 대한민국 U-20 대표팀이 U-20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면, 참가기록 관련 기사나 동영상이 인터넷이 쫙~ 깔린다. 그 유명한 1983년 멕시코 대회는 내가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던 해라 그냥 동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나름 축구에 대한 관심이 생긴 1992년 이후 개인적인 기억에 남는 순간인 1997년 대회의 철학부터 여기에 남겨보기로 결심했다. (먼저 해당 대회 명칭의 변천사를 소개한다.) 1977~2005 FIFA World Youth Championship (FIFA 월드유스챔피언십 - 우리나라에서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로 부르곤 했었다.) 2007~현재 FIFA U-20 World Cup (FIFA U-20 월드컵) 보통 4년을 주기로 개최하는 FIFA 월드컵과 달리, 이는 1977년부터 2년을 주기로 (단, 2021년은 코로나 상황으로 예외) 개최하는 FIFA 주관 연령별 대회 중 하나이다. 나름 역사가 있고, 명칭과 참가 연령이 변경된 사례가 있

지난날 - 15 [통학(하는 수험)생] [내부링크]

전편 - [2009년, 마지막 도전] (링크) 2009년, 나름 비장한 각오로 국공립학교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에 마지막으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 와중에 엄마는 단호했다. 엄마 : '이제 자취 그만하고, 이모네 집에 드가가 지내라. 돈 많이 드간다.' 나 : '이모가 그래도 된다 카나?' 엄마 : '그래. 다 이야기 해놨다. 아침 일찍 일나가 독서실이나 (숭실대)학교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공부해라. 시간 남을 때, (이종사촌)동생들 (산수)공부 좀 봐주고.' 동의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백수가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돈 많이 드가는 백수는 집에서도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엄마 말이 맞다.) 대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통학(하는 수험)생이 되었다. 나름 숭실대 의대 6학년(?)이라 자청하며, 수험 베이스캠프는 (숭실대)학교 도서관으로 선택했다. (무료니까ㅎ) 그리고 고학번이 된 수학과 회장직을 맡고 있던 후배에게 사물함 한 칸 무상임대를 당당히(?) 요

지난날 - 16 [원서접수 마감일의 반전] [내부링크]

전편 - [통학(하는 수험)생] (링크) 2009년 10월 7일 수요일, 기다리던 '2010학년도 국공립학교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 시행 공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간은 그냥 간다. 매년 되풀이되는 시험이기 때문에 수험생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세부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정 일시 및 기간 참고사항 원서접수 기간 2009년 10월 12일 월요일 09:00 ~ 2009년 10월 16일 금요일 18:00 전국 동일, 중복지원 가능 1차 시험일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1차 시험 합격자 발표일 2009년 12월 4일 금요일 10:00 2배수 선발 2차 시험일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2차 시험 합격자 발표일 2010년 1월 8일 금요일 10:00 1.5배수 선발 3차 시험일 2010년 1월 19일 화요일 ~ 2010년 1월 20일 수요일 최종 합격자 발표일 2010년 2월 5일 금요일 10:00 1배수 선발 '국공립학교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

강철전사의 기억 - 3 [도하의 기적이 끝나고 (일본보다 늦게) 생각한 2002 FIFA 월드컵 유치 Part 1] [내부링크]

배경 스토리 - [1994 FIFA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5차전(對 북한), 도하의 기적] (링크) 1993년 10월 28일 목요일, '도하의 기적(대한민국 축구사의 3대 기적 - 1 of 3)'으로 대한민국은 1994 FIFA 미국 월드컵에 참가했다. 딱 한 경기(조별리그 2차전 對 볼리비아)를 제외하고서는 세계의 강호(스페인, 독일)에게 뒤지지 않는 투지를 발휘했기에, 세계에서 박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월드컵 1승이 정말 어려웠고, 그 '1승'을 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줄도 몰랐다.) 조별리그 3차전(對 독일)을 보고서야 '클린스만'의 위력을 알았다. 그렇게 미국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야 대한민국축구협회(KFA)에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월드컵 한 번도 못 나가본 일본이 2002 FIFA 월드컵을 단독으로 개최할라 카는데, 우리는 뭐 하고 있는 기고?' '도하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진짜 일본의 단독으로 월드컵 개최 분위기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질

강철전사의 기억 - 4 [도하의 기적이 끝나고 (일본보다 늦게) 생각한 2002 FIFA 월드컵 유치 Part 2] [내부링크]

전편 - [도하의 기적이 끝나고 (일본보다 늦게) 생각한 2002 FIFA 월드컵 유치 Part 1] (링크) 이 과정을 시간 순으로 포스팅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작성하다 보니) 의도와 달리 중요한 이벤트를 뽑아봤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자극(질 수 없다.)을 받아 뒤늦게 2002 FIFA 월드컵 단독 개최를 위해 범국가적으로 스포츠외교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담배갑, 전화카드, 버스 및 택시 광고판, 버스정류장 등등 생활주변 곳곳에서 그 의지(아래의 로고)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당연히 국가대표 유니폼 왼쪽 소매에도 아래의 로고가 부착되어 있었다.) 1995년, 이 로고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나는 이 로고의 뱃지를 교복에 살~ 달며 잠시나마 애국자 행세를 했었다. 1995년 9월 29일 금요일 - KFA(대한축구협회)는 FIFA(국제축구연맹)에 2002 FIFA 월드컵 단독 개최 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 작성, 제출, 그 이후의 과정은 스포츠

DGB 대구은행원 [상업계 고졸 공채] [내부링크]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포항'과 '영덕(읍)'을 잇는 7번국도를 왕복하던 2년이 지나고, 2021년 3월,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기계중학교'로 이동(전입)하게 되었다. 이곳은 (행정구역) 읍면지역의 소규모 농어촌소재교인 관계로 '기계중학교'는 '경북세무고(상업계 고등학교 - 舊 기계고)'와 병설교(竝設校)라는 특징이 있다. 개인적으로 2019년부터 '진로진학 및 취업'에 살짝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기계중학교'에서도 운 좋게 '중3 담임'을 지금까지 맡고 있다. 업무적인 역할도 있지만, 병설교에서 '가족'처럼 지내기 위해 '경북세무고' 교무실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지켜본 취업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경북세무고 김소연 학생, 대구은행 신입 행원공채 합격 - 경북신문 (링크) 대구, 경북에서 DGB 대구은행은 전통이 있는 금융기관이다. 내가 당시의 '김소연 학생'을 직접 담임하며 지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경북세무고'에 자주 출입하며 전교생과

한국은행원 [상업계 고졸 공채] [내부링크]

전편 - DGB 대구은행원 [상업계 고졸 공채] (링크) '기계중학교'에서 나름 진로진학 및 취업에 관심을 가지며 지내온지 2년 차, 병설교인 '경북세무고'에서는 2021년 'DGB 대구은행 신입 행원 공채 합격'에 이어 2년 연속 금융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대졸자가 금융권 공채를 위해 생쑈를 해봐야 합격률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시국에 (주변에 이런 사례가 있었다.) 가까이서 반가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ㅎ 경북세무고 김나현 학생, 한국은행 공채 합격 - 경북신문 (링크) 한국은행은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이다. 지폐를 보면 저 글씨가 있다. 이는 'DGB 대구은행원'의 사례(링크)와 마찬가지로 내가 당시의 '김나현 학생'을 직접 담임하며 지도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경북세무고'를 손님처럼 찾아가 몇몇 학생의 취업 준비 상황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던 중, 당시의 '김나현 학생'이 '한국은행 상업계 고졸 공채 전형'을 준비한다는 것까

중학교 영어, 수학이 안되는 친구의 꿈 [대학교 진학, 그리고...] [내부링크]

2021년 3월, 꿈에 그리던 '기계중학교'로 전입해가 '중3 담임'을 맡았다. 3학급(1학년 1반, 2학년 1반, 3학년 1반) 뿐이라 '중3 담임'이 곧 '3학년 1반 담임'이며, '중3 담임'이 '진로진학업무'를 담당할 수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닥치고 그냥 하는 기 마음 편하다. 어차피 2019년 언젠가부터 '진로진학 및 취업' 분야에 살~ 관심이 생긴지라 기분 좋게 시작했다. 사실 '중3 담임의 '진로진학' 업무는 1 ~ 2학년 담임 업무에 비해 부가적인 것이라 본인이 특별한 뜻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아~무도 안 할라 칸다. 역시 나는 남들이 안 하는 걸 한다ㅎ) 2021학년도 3학년 1반 학생은 11명(선수교체 없는 축구팀)이었다. 이 11명을 따로따로 포스팅하며 게시물의 양을 늘릴 수도 있으나, 내가 비교적 관심을 기울이며 지켜볼 수 있는 친구 몇 명(이라 해봐야 많지 않다.)을 위주로 포스팅을 해볼라 칸다. 그 중 첫 번째로 포스팅할 친구는 제목과 같다. 이

지난날 - 17 [시험장은 평범한 '정문'으로 드가자!] [내부링크]

전편 - [원서접수 마감일의 반전] (링크)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2010학년도 국공립학교 중등교사임용(후보자선정경쟁)시험'을 하루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귓가에는 '마음의 소리'를 비롯한 '오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다음날 05:00쯤 이모의 아침상 차리는 소리까지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눈만 감은 채 귀는 열려있었던 것이다. (사실 지난 2년간 시험날에도 어김없이 똑같은 증상을 보였었다.) 괜찮다. 이미 시간은 흘렀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인천으로 향했다. 시험장은 '부평서중학교'. 널널한 분위기의 시험장 인천광역시 부평구 화랑로 29 부평서중학교 이 블로그의 체크인 시험장 근처의 '백운(白雲)'역에서 내리는 순간, 나처럼 보이는 '수험생'이 제법 있었다. 그들 중 앞장선 누군가를 조용히 따라가기만 해도 시험장까지 자연스럽게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근데 하필이면 이날에도 '남들이 안 하는 걸 한다'꼬 시험장에는

지난날 - 18 [시험에 반드시 고비는 온다. COOLDOWN 루틴!] [내부링크]

전편 - [시험장은 평범한 '정문'으로 드가자!] (링크) '본령(本玲)'이 울렸다. 이날을 위해 2009년을 투자(?)했기 때문에 지난 2년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어떻게든 탈출해야된다. 아니, 탈출해야만 한다! 고사실 칠판에 붙어 있던 2009년 11월 8일 일요일의 일정이다. 시간 문제수 및 배점 1교시 교육학(객관식) 09:00 ~ 10:10 (70분) 1문항 0.5점 * 40문항 = 20점 2교시 전공(객관식) 10:40 ~ 12:40 (120분) 1문항 (평균)2점 * 40문항 = 80점 (1.5점, 2점, 2.5점 차등배점) 아쉽게도 1교시 시험은 어땠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산수'과목은 전국적으로 '교육학' 점수가 다른 과목에 비해 낮은 편이라 20점 만점에 15점 ~ 16점 획득을 목표로 했었던 것 같다. 본게임은 2교시, 쿨하게 모르는 문제는 일단 넘어가고 나중에 해결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했으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모르는 문제의 수가 폭증(?)하기 시작했

지난날 - 19 [종료령 울리기 직전의 반전] [내부링크]

전편 - [시험에 반드시 고비는 온다. COOLDOWN 루틴!] (링크) 이제 10분 남았다! 지난 2년과 달리 시험 중 (예정에 없던) '플랜 B'를 통해 고비를 넘기고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을 하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리며 대략 5분을 썼다. 5분 동안 대략 이 정도의 느낌이었다. 시험 마치고 일단 사우나에 가가꼬 푹~ 찌지고 싶었다. 남은 5분은 시험의 정석대로 문제지에 표기한 40문제의 답안을 OMR카드에 정확하게 옮겼는지 확인하는 데 할애했다. (참고로 고등학생 무렵부터 OMR카드를 사용하는 시험에서는 꼭 이런 습관을 들였고, 이 과정에서 크게 실수를 한 경험은 많지 않았었다ㅎ) 완벽(?)했다. 또 어느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3년간(2년의 실패, 1년의 재구조화) 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준비한 과정이 곧 마무리된다니 좀 허무하게 느껴질법도 했지만, 정말 '마지막 확인'차 문제지를 스스륵~ 디끼보다가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한 문제'를 다시

강철전사의 A매치 철학 - 4 [1994 FIFA 미국 월드컵 C조 1차전 (對 스페인)] [내부링크]

'도하의 기적'으로 미국 땅을 밟게 된 대한민국 대표팀은 1994 FIFA 미국 월드컵 'C조'에 편성된다. 당시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는 국가의 수(24개국 - 아시아 2개국)가 지금보다 적었기에, 대회 진행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대회 진행 방식 - 1982, 1986, 1990, 1994 FIFA 월드컵 - 24개국 참가 (6개조 편성, 각 조 1~2위 16강 토너먼트 진출, 각 조 3위 6개국 중 상위성적 4개국 토너먼트 진출 - 와일드카드) 그리고 그 'C조'는 어떤 조였던가? 국가 포트 배정 독일 1포트 - 직전대회 우승팀 볼리비아 2포트 - 비톱시드 남미팀 스페인 3포트 - 비톱시드 유럽팀 대한민국 4포트 - 아시아팀 그때나 지금이나 저 포맷은 절대로 쉬운 조편성이 아니다. (조3위에게도 와일드카드의 기회가 있었던 1994년이 오히려 쉬웠지, 2팀만이 토너먼트 녹아웃 스테이지에 진출하는 지금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저 축구를 좋아하는 국민학교

지난날 - 20 [확실한 휴식! 반갑다! 위닝일레븐!] [내부링크]

전편 - [종료령 울리기 직전의 반전] (링크) OMR 카드는 내 손을 떠났다! 당분간은 긴장을 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나 자신에게 조금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일단 시험 종료 후 푹~ 찌질 수 있는 사우나로 향했다. 1년 전처럼 시험장 근처의 사우나를 급히 찾아가 시험에 대한 아쉬움을 재빨리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에, 일단 시험장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 내부의 어느 사우나였다. (기억이 흐려진 탓에 지금은 그곳이 어디였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어가꼬 아쉽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푹~ 찌지고 싶었다. 진짜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한 문제를 내가 오케 풀었는지 말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카면 안 된다!' 이번에는 그냥 눈을 감고 쿨하게 잊었다. 다음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빨간펜'을 슥~ 꺼내들었다. 공개된 정답을 내가 선택한 답과 비교

지난날 -21 [이대로 딱~ 3주만 즐기자!] [내부링크]

전편 - [확실한 휴식! 반갑다! 위닝일레븐!] (링크) 확실한 휴식 방법을 떠올린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 그래도 '자취방'과 '플스3'의 '주인(친구)'에게 내 사정을 설명하고 허락을 받는 기 순서였다. 참 고맙게도 당시 '직장인'이던 그 친구는 나에게 '자취방의 평일 사용 권한'을 넘겨주었다. (돌아보니 그 친구에게 속 시원한 사례를 하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 친구에게 민폐가 많았었는데, 언젠가 다음을 기약하며 미안한 마음을 남긴다.) 1차 시험을 마친 나의 (평일 기준) 루틴은 아래와 같았다. 당분간 친구 자취방의 열쇠를 양도(?) 받았다. 자취방 주인(친구)이 '출근'하며 방을 비운다 -> 일정 시간 후 내가 입장한다 -> '플스3'의 전원을 키고 '위닝일레븐 2010'을 실행한다' -> '즐겜'으로 시간을 보낸다 -> 자취방을 정리(?)한다 -> 주인이 돌아온다 -> 주인에게 패드를 넘기거나 같이 즐긴다 -> 나는 퇴장한다 TMI - '즐겜'으로 최대한 많

지역인재 9급 공무원 對 (대학생이나 젊은 친구들이 선택하는) 보통의 9급 공무원 [내부링크]

'지역인재 9급 공무원' 이라는 단어를 아직도 생소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이 많다. 간단히 말하면 직업계고 (및 전문대학) 졸업(예정)자가 (6개월 수습근무 후) 9급 국가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에이... 그기 (대학생이나 젊은 친구들이 선택하는) 보통의 '9급 공무원'하고 뭐가 다르노?' 이카고 있는 사람은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있지 못한 것이다. ('지역인재 9급 공무원' 전형은 2012년에 등장했다.) 시대가 변했다. 나는 삼성생명 가입 상품 읍다. 그렇다면 '지역인재 9급 공무원'과 (대학생이나 젊은 친구들이 선택하는) 보통의 '9급 공무원'과의 '차이'를 간단히 살펴본다. '지역인재 9급 공무원' (대학생이나 젊은 친구들이 선택하는) 보통의 '9급 공무원' 3과목 응시 - 국어, 영어, 한국사 5과목 응시 - 국어, 영어, 한국사, 선택과목1, 선택과목2 4지선다형 객관식 5지선다형 객관식 최대 2회(1년에 1회)까지 응시 가능 직렬에 따라 1년에 최소 1회 이상 응시

지역인재 9급 공무원 합격 사례 [용의 꼬리 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자!] [내부링크]

전편 - [지역인재 9급 공무원 對 (대학생이나 젊은 친구들이 선택하는) 보통의 9급 공무원] (링크) 내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지역인재 9급 공무원 합격 사례를 소개한다. '기계중학교'에서 햇수로 3년째 '중3 담임'을 하며 병설교인 '경북세무고' 학생 취업 현황에 살~ 관심을 갖고 있다. 오늘은 2022년 '지역인재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한 학생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역인재 9급 공무원'에 대한 정보는 위의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소규모 특성화고에서 두 명이나 지역인재 9급 공무원 시험 합격자를 배출하다니! 정말 큰일이었다ㅎ 핵심은 아래의 링크다. (두 명 중 한 명의 사례이다.) 경북세무고 남서윤 학생 9급 세무직 국가공무원 최종 합격 - 경북일보 (링크) 그리고 경북세무고에 입학한 '그녀의 배경'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019학년도 - 교명 변경(기계고 -> 경북세무고) 및 학과 개편(세무회계과, 광고마케팅과) & 신입생 입학 2020학년도 - '남

지난날 - 22 [한강공원 잠원지구에서 퓨마부대의 괴성, 1차 시험 합격!] [내부링크]

전편 - [이대로 딱~ 3주만 즐기자!] (링크) '플스3', '위닝일레븐 2010', '마스터리그'와 함께한 꿈만 같았던 3주의 시간이 지났다. 생각해보면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던 3주간의 '마스터리그'는 지금껏 내 인생 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다시 수험 베이스캠프로 향할 차례이다. (인간적으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할 타이밍이기도 했다.) 2009년 11월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마스터리그) 마이 했다 아이가. 고마해라~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 (3일 후) -> 2009년 12월 4일 금요일 (1차 시험 합격자 발표일) 당락 여부를 알 수 없었던 상태였으나, 확실한 것은 마음이 비교적 편해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삼수생'으로 '적당한 내공(?)'을 쌓았던 탓에 2차 시험(서술형 주관식)은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2009년에 공부하며 새롭게 작성한 '나만의 목차'를 떠올렸고, 1차

지난날 -23 [플랜 A로 경쟁자를 물리쳐라!] [내부링크]

전편 - [한강공원 잠원지구에서 퓨마부대의 괴성, 1차 시험 합격!] (링크)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제 2차 시험일, 생존 서바이벌을 위한 2배수 명단(60명)에 들었다. 1차 시험일 전날에는 눈만 감고 귀는 열린 상태로 누워 있었다. 긴장(?)을 한 탓에 숙면을 취하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거 없었다. (벌써 무뎌졌다ㅎ) 1차 시험 후 나름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삼수생의 적당한 내공(?)을 믿으며 비교적 마음 편하게 2차 시험을 기다렸다. 고사장은 인천남고등학교! (이번에는 딴 생각 안 하고 시험장 정문으로 드갔다ㅎ)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시험장 인천광역시 남동구 석정로551번길 41 인천남고등학교 이 블로그의 체크인 각 과목별로 1차 시험을 통과한 생존자(2배수 - 60명)끼리의 서바이벌이기 때문에, 결시율과 빈자리를 기대할 수 없다. 괜찮다. 이제는 순수히 각자의 실력에 생존 여부가 달려 있다. 이번에는 뒷문 쪽 맨 뒷자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지난날-7 [20세기 마지막 대입 '특차' 오프라인 원서 접수, 그리고 합격] [내부링크]

인터넷 원서접수가 당연한 요즘이야 인터넷 환경과 결제수단만 있으면 편하게 가능한 일이다. 분명히 서기 '2000년', 인터넷으로 '세이클럽'과 'DAUM'을 활발히 사용 중이었는데도 인터넷 원서접수는 대중화되지 않았었고, 나름 경북 No.1 도시 '포항'에서조차 대입 '특차' 원서 접수를 위해 인근 광역시 '대구'까지 방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쉽게 말해 경북의 거의 대부분 수험생이 대구로 직접 찾아온다는 뜻이다. (지금 생각하면 대박이다ㅎ) 원서 접수 방식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물론 기억에 의존한 것이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1. '특차' 원서를 쓰는 친한 친구 몇몇과 같이 대구행 시외버스를 탄다. 2. 당시의 동부정류장(現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 481-1)에서 내려가꼬 어떻게든 대구야구장으로 간다. 3. 대구야구장 근처 공간에 마련된 대입 '특차' 원서 접수 코너(現 DGB대구은행파크 부지)를 찾아간다. 4. 각자 자신이 지원하는 대학교의 '특차' 원서 접수 창구

프롤로그(블로그의 첫 시작) [내부링크]

2023년 5월 30일 화요일, 영화 ‘범죄도시3’ 개봉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약 2,000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블로그를 운영 중인) 국민학교 친구가 ‘범죄도시3’ 시사회를 다녀왔다는 페이스북 링크를 보고, 오랜만에 카톡으로 연락했다. (페이스북 링크가 그녀의 네이버 블로그에 자동으로 연결이 되는 관계로 그 게시물을 직접 링크한다.) 범죄도시3 VIP 시사회 with 손석구와 함..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링크) (명절, 새해 첫날 등을 이용하여 카톡으로 안부 인사를 건넸었는데, 그날은 ‘범죄도시3’ 시사회 링크가 내게 너무 강렬하게 다가와서인지 망설임 없이 카톡으로 인사했다. 대박인 것은 그 '범죄도시3'의 이상용 감독님과 내가 먼 옛날 한 동네에서 같이 살았다는 사실이다ㅎ) 범죄도시3 시사회를 다녀왔다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건넨 인사 (PC 카톡이 편하고 좋긴 하다.) 시작은 ‘범죄도시3’ 시사회였지만,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친구로부터 ‘너도

지난날-1 [출생~국딩] [내부링크]

1983년 2월 7일 월요일, 시간은 모른다. 엄마에게 들은 말로는 난 그날 포항성모병원에서 태어났다. 포항성모병원(나의 출생지)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잠동길 17 포항 성모병원 포항성모병원(지금은 대이동 택지지구 개발로 대잠못의 흔적은 없다.) 국민학생이 되어서 경험적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시절 성모병원 응급실 뒷쪽에는 대잠못이 있었다. 대잠못이 낀 성모병원 사진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 아쉽다. 다만, 성모병원 본관 1층에 가면 성모병원 연혁을 사진과 함께 소개해 놓았는데, 그곳에는 대잠못과 성모병원이 절묘하게 조화된 사진이 있다. 언젠가 성모병원 가가꼬 그 사진 찍어보고 싶다. (국민학교 시절, 대잠못으로 소풍을 가면 돗자리도 깔기 전에 꼭~ 무단이탈 해가꼬 개구리(알), 올챙이 채집하러 가긴 했었다. 그런 추억이 있었다. 나 말고도 대잠못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낀데...) 그리고 포항시 죽도동 오광장 근처의 몇몇 주택가에서 국중고 시절의 거의 대부분

지난날-2 [중학교 배정] [내부링크]

개인적인 정신세계와 가치관이 삐딱해지기 시작한 곳은 포항시 우현동에 있는 어느 사립 중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물론 내가 그곳에서 잘한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안다. 나 스스로 건전하지 못했음에 진짜 반성해야 된다.) 인권유린재단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소티재로 107 영신중학교. 영신고등학교 당시 개인적으로 집 근처에서 비교적 도보로 등하교가 가능(?)했던 '상도중학교'를 진심으로 원했으나, 남학생은 번호순대로 '포항중-대동중-영신중'의 3박자 로테이션이 철저하게 적용된 배정이었고, 그 규칙에 의해 나는 그놈의 Y중학교에 배정을 받았다. (특수교육 대상자 몇 명만 상도중학교로 배정받았다. 이 점은 인정할 수밖에.) 그 3군데 학교 중 그나마 동네에서 가까운 포항중으로 배정받은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그 시절 살던 빌라에 국민학교 6학년 남학생이 나를 포함해가 3명 있었는데, 그 3명이 포항중, 대동중, Y중에 골고루 배정받았으니, 나름 균등배정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

지난날-3 [인권유린재단에서의 생존기] [내부링크]

1997년 중학교 3학년 당시 인문계고 진학 희망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고입선발고사(체육 제외 전과목 180점 + 체육 내신 환산점 20점 = 200점 만점)'라는 제도가 있었다. 교학사에서 출판한 '**년간 고입총정리' 책은 암묵적으로 국민 수험서 대접을 받곤 했었다. (그 당시의 교재 사진은 찾을 수 없어 비슷한 것으로 사진을 띄워 본다.) 교학사 출판 **년간 고입총정리 전국에서 꽤나 유명한(?) 고입비평준화지역이었던 포항(경주, 안동 등)에서 인문계고를 간다 카는 학생은 이 시험(12月)을 준비(?)하기 위해 매달 사설모의고사를 봤었다. 나는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고 어중간~[ 모의고사 평균 140점~160점 정도 / 180점 만점 ]했으니 당연히 인권유린재단 소속 그놈의 Y중학교에서 그놈의 Y고등학교로 강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 탓하겠나? 근데 그 재단에서 탈출했다 하더라도 인생의 큰 변화가 있었을까?) 인권유린재단의 만행이 그놈의 Y고등학교에서 절정을 꽃피우고

지난날-4 [물수능, 20세기 마지막 수능] [내부링크]

2000년 11월 15일 수요일, 20세기 마지막 수능을 마치고 아~주 천천히 기숙사로 돌아왔다. 수험표 뒷면에 적어온 답과 모범답안을 비교해 보며 가채점을 시작했다. (수능을 친 수험생 누구나 다 겪는 과정이다.) 보통은 1교시 -> 2교시 -> 3교시 -> 4교시 -> 5교시 순으로 채점을 하지만, 여기서 남들이 안 하는 걸 한다는 똘끼를 발휘하며 5교시 -> 4교시 -> 3교시 -> 2교시 -> 1교시 순으로 채점했다. (난 인문계였지만 긴 지문에 대한 난독증 트라우마가 있어 언어영역(국어)이 늘 약점이었기 때문에 언어영역의 점수가 늘 두려웠다. 3년간 언어영역 모의고사를 수차례 쳐봤지만 120점 만점에 100점을 넘어본 적이 단 한 번뿐이었으니까.) 5교시) 제2외국어영역(독일어) : [ 40점 / 40점 만점 ] 0점 감점 4교시) 외국어영역(영어) : [ 76.5점 (1.5점 * 1개, 2점 * 1개) / 80점 만점 ] 3.5점 감점 3교시) 수리탐구영역2(사회/과학)

지난날-5 [심플한 진로선택, 수치화된 점수가 갑이다.] [내부링크]

2000년 12월 12일 화요일, 수능 성적은 가채점 결과와 같았다. (내가 과목별로 표기한 답안을 단지 수험표 뒷면에 잘 옮겨 쓴 것뿐이다.) 앞서 언급했듯, 인권유린재단 그놈의 Y고등학교는 수험생에게 수능성적표 '사본'을 전해주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가관이다ㅎ) 당시 대입전형은 크게 '특차(수능 점수 100%, 내신성적 불문)'와 '정시(수능 점수, 내신성적, 논술, 면접 등 각각 반영)'로 구분했다. '특차'는 단 한번 , 더군다나 '정시'는 '가~라' 군까지 기회가 있었다. (그러니까 총 1 + 4 = 5번의 기회) 현행 대입제도와 비교하면 진짜 심플할 뿐만 아니라 대박 수준이 아닐 수 없다. (학교생활기록부 교과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이딴거 1도 필요 없었다. 인성의 결함 따위는 형식적인 면접에서 큰 변수가 되지 않는다. 오직 수치화된 수능 점수, 내신성적만이 갑이었다.) 내신성적은 관심도 없었기에 필살기인 수능 점수만으로 당

지난날-6 [원서로 뺨을 맞았다.] [내부링크]

흥미, 적성 따위는 1도 없이 수능 점수에 맞춰 숭실대 수학정보통계학부를 향해 '특차' 원서를 쓰기로 심플하게 결정했다. 지원조건에 결격사유가 없으면 담임선생님께 '저는 **대학교 ***학부(학과)로 특자 원서를 쓰려 합니다.'라고 말씀만 드리고 원서를 접수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그놈의 Y고등학교는 원서를 쓰는데 반드시 담임교사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안내하며 일말의 자유를 박탈하는 만행을 어김 없이 보여주는 철학을 유지하고 있었다. (갈수록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놈의 허락이란...) 난 성격이 급한 편이다. 나름 심플하게 정한 결과를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러 교무실에 입장했다. (당시 교무실 분위기는 다소 분주했고, 담임선생님 옆에는 나름 인문계 상위권 '학생 A' 한 명이 상담을 받던 중이었다.) 나 : '특차 원서 쓰러 왔는데요.' 담임선생님 : (내가 안중에 없다는 듯 어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뭐? 어디로?' 나 : '숭실대 수학정보통계학부요.' 담임선생님 : (배치표를

IBK 기업은행원 [내부링크]

이 친구(제자)와의 첫 만남은 대략 2011년 3월 중순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인천부흥고에서 2년차 교사였던 나는 이 친구가 갑자기 안양외고에서 굳이 이곳을 찾아 전학을 온 이유가 굉장히 궁금했다. (이 친구의 담임도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사연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일까?) 그 이유는 '내신등급'으로 명확했다. 인천부흥고... 잊을 수 없는 학교이긴 하나, 학생별로 지적수준 및 기초생활습관에 따른 편차가 학생별로 너무나 컸기 때문에 (한 반 30명~33명 중에 공부하는 친구는 많아야 4명~5명 정도였으니...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론적으로 가능한 전략이긴 했다. 주관적 기억에 의존한 그 친구를 통한 대면 문답을 기록해 본다. (약간의 재구성이 있음.) 인천에 있을 동안 나는 진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멨었다. 나 : '오 그래. 니가 ***구만! 근데 이까지 우째 전학온기고?' 친구(제자) : '안양외고에 1~2주 정도 다녀보니까 거기서는 도저히 내신

지난날-8 [고삐풀린 망아지, 그리고 군대] [내부링크]

2001년, 생일 빠른 반칙캐릭터 19세의 대학생이 된 나에게 TV 시트콤이나 영화에서 보던 캠퍼스의 낭만, 풋풋한 이성관계(?)는 비교적 인연이 멀었다. 사실 입학 전부터 당시 숭실대 재단이사장의 비리 문제로 캠퍼스 내에는 재단이사장 및 이사회 퇴진의 목소리를 내는 각종 포스터와 현수막이 가득했다. 대략 6개월 이상 학생, 교수진 모두 시위에 참여했기에 몇몇 수업은 휴강이 잦았고, 이 또한 당연한 자유의 권리(?)라 착각했다. 당시 자연대 수학과, 대학본부 건물 모습이 저랬다. 얼마 후 총장을 감금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진짜다.) 총장이 화장실은 제때 갈 수 있었나 궁금하다. 여윤배 총장 감금 장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 숭실대학교 매일 아침저녁마다 잔소리를 하던 담임선생님 같은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대학생이라는 말로 엄연한(?) 성인 대접을 받았기에 인권유린재단에서 강제수용되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런 삶은 천국이었다. 그러니 고삐 풀린 망아지가 아닐 수 없었다. 생

지난날-9 [지구는 살아있었고, 엇박자 복학은 안된다!] [내부링크]

故 노무현 대통령의 현역병 복무기간 단축 방침에 따라 예정보다 1개월 일찍 전역을 할 수 있었다. (복무기간 단축 뉴스 듣자마자 모든 사람이 박수를 쳤다. 부대원 사기 진작!) 2004년 8월 11일 수요일, 예상보다 빨리 민간인으로 돌아왔다. 외계인 침공, 운석, 초대형 자연재해는 없었다. 지구는 살아있었다. 시간은 그냥 간다. 국중고 실절 12년으로 완성된 개인적인 삐딱하고 부족한 가치관 덕분에 대학생활조차 후회되는 부분이 더러 있다. (발굴해내면 더 있을 것이다.) 어렸고, 이기적이었다. 또다시 진심으로 반성한다. (2회차 인생에서 대학교를 다시 다닐 수 있다면, 정말 구김 없이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재미있게 다니길 기원한다.) 군대를 다녀와도 여전히 부족했고, 인성의 어딘가에 결함이 있었던 나에게 행운이 찾아와 교직이수(교직과정)의 기회가 주어졌다. 마동석 같은 선생님 될 수 있다면!ㅎ 교직이수(교직과정)를 간단히 설명한다. 1. 교직과정이 설치된 대학교 비사범계 교사 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