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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 큰성 바벨론에 있는 교회들에게 [내부링크]

(요일 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미디어, 의학, 과학, 정치, 경제, 시스템, 문화 등 온 세상은 마치 오늘날이 마지막 때라는 것을 깨어 있는 성도들에게 매일 확인시켜주고 있는듯하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에 거의 모든 프로그램(드라마, 영화, TV쇼)은 물론이고, 유튜브, 현대예술과 문화콘텐츠, 웹툰, 웹소설에 이르기까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 이들에게조차 계속해서 마지막 때임을 알려주고 있다. 바벨탑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어 흩으셨으나, 오늘날은 언어가 달라도 플랫폼이라는 몇개의 시스템 안에서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사는 사람들이 매일 한국의 콘텐츠를 보고 즐기며 하나의 사상과 하나의 어젠다를 공유하며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알리는 세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혼잡케하신 언어가 더는 문제가 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 [내부링크]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는 기적을 보고 쫓아온 인간들 너희 믿는 거 아니라고 계속 피하시고 몰려온 군중들은 자꾸 그것만 보여 달라고 졸졸 쫓아다니는 웃픈 장면이 나타난다. 민속 메시아 신앙관에서 이 땅의 것을 갈구하는 인간 측과 하늘의 것을 주러 오신 하나님과의 대척점에 선 장면이었다.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이 세상에서 뭔가 얻어보려고 오는 인간들한테 주님께서는 너희가 원하는 거 주려고 온 게 아니라고 나는 하늘의 떡인데 왜 이 땅의 떡을 달라고 쫓아오냐고 하시다 오병이어를 경험한 수만명 가운데 겨우 열둘만 남고 다 떠나게 하셨다. 초대 교회 이후로 끝없이 출현하는 이단사이비들이 꾸준히 해온 복음 선교화, 복음 세계화가 얼마나 말

세상을 이기는 믿음 [내부링크]

은혜, 회개, 믿음, 행위 등을 근거로 수많은 논쟁이 발생하고 수많은 이단들이 나타나는 기독교 안에서 무엇이 올바른 그리스도의 교리인지 성경 말씀을 통해 전하고자 한다.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선 은혜라는 것은 도저히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존재가 자격을 갖춘 존재로부터 받는 것을 은혜라고 한다. 신의 은총, 왕의 은혜, 어머니의 은혜는 들어봤어도 신을 위한 인간의 은혜, 왕을 향한 신하의 은혜, 어머니를 향한 초등학생의 은혜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자격을 갖추었을 때 창조주로부터 받는 것은 더는 은혜라고 하지 않고 자격을 갖추고 받는 합당한 보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마치 이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식의 수많은 잘못된 설교가 난무하고 있다. '은혜 받았다', '은총을 입었다'란 피조물 측에서 어떠한 공로도 가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서 성도는 은혜를 받기 위해 다른 종교처럼 노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해야 할 네 이웃이란 [내부링크]

이 말세에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 착한 사람이 오직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기독교보다 타종교에서 더 자주 나타나는 모습을 우리는 세상살이하면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솔직하게 객관적으로 따져 보자. 세속을 떠난 불교의 중들과 힌두교의 수도승들이 더 착한가, 세상에 있는 교회의 목사들이 더 착한가? 힌두교, 이슬람교, 심지어 신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나 종교 없다는 비종교인들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선행이 더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 학위 다 버리고 평생을 아프리카 이웃을 위해 봉사와 헌신만 하다 죽은 슈바이처는 어떠한가? 자유주의 신학자이기도 했던 슈바이처는 그의 연구나 저술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예언을 잘못하다 스스로 고난 받고 사랑을 실천한 기독교의 실천적 선구자로 평하며 본받아야 할 위인 정도로 여기고 있던 슈바이처는 자신의 인생을 던져서 구제와 봉사에 힘썼다. 매일 산상수훈을 읽으며 예수를 본받으려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진짜와 가짜 복음 분별 [내부링크]

진짜 복음과 가짜 복음 분별. 굉장히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고 또 초신자라면 정말 하루에도 수도 없이 고민해봐야 하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성도 된 자로서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멸이 갈리는 인생 최대의 중차대한 일을 어떻게 다른 일보다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있을까. 사업을 망하면 열심히 노력해서 재기할 수 있고, 수능을 망치면 재수할 수 있지만, 심판대 앞에 한번 서면 돌이킬 수 없다. 마태복음 7장 말씀처럼 주께서 "나는 널 도무지 몰라." 하면 끝인 것이다. 성도는 말씀에 대해, 진리에 대해 진지해야 한다. 자신의 일상과 돈, 가족, 꿈, 취미, 미래에 대해서는 하루에도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쓰고 고민을 하면서 어떻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이 갈릴 수 있는 진리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겠는가. 지난주 주일에도 같은 시각, 같은 시간에 수많은 교회에서 예배가 열리고 찬송이 울렸지만 그 가운데 진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펌] 죄란 무엇인가 [내부링크]

죄의 기원을 생각하면,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을 생각할수 있다 선악과란, 좋고 나쁨, 부끄러움을 알게되는 지식의열매/인식의열매/기준의열매 라고 할수있다 마귀는 뱀을통하여 여자에게 말한다 너가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 너가 하나님처럼 될수있다 영어번역 성경에선 "너가 god 처럼 될수있다고 기록 됨" GOD => 하나님 / god => 다른 신 또한,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말하셨지만 마귀는 결코 죽지아니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즉 내 자신을 높이고, 내가 나의 주인되어 내가 선악을 구분하여 판단하는자, 정죄하는자, 나의 나됨의 정당한자 가 되는것 내가 곧 내 주인이며 오직 나를위한 나를위함. 내가 잘되야하고, 행복해야되고, 기뻐야되고 회복되야되고, 위로받아야하고, 죽지않아야되는 본질. 예수를믿어도, 내가 잘되고, 잘먹고 잘살고 위로받고 회복되기 위해서 오직 내가 "살기" 위해, "내가" 믿는것이고 구원을 구하는것도 본질은 "내가 결코 죽지않고 살기위함" 내가 희생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vs 거짓 자기부인 [내부링크]

지난번 분별에 관해 말씀을 나누고 또 일상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없이는 절대로 거듭날 수 없구나 매일 깨닫고 있다. 똑같은 복음을 듣고도, 성경을 읽고도 나오는 말이 다 다르다. 마치 검문하듯 육의 입으로 시인하는 "예수를 믿어? 안 믿어? 구원 받았어? 안 받았어?" 이걸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시 말해도 정말 모든 것이 은혜 인데 꾸준히 지켜봐온 교회에서 "저렇게 예수를 외치며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다 아닐수도 있다고? 저 열심히 예배 드리고 찬양하는 젊은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하는 심란한 마음도 들었다. 왜냐하면 초창기 필자가 말씀을 깨닫고 진리를 알도록 도와준 그들도 똑같이 예수, 십자가,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또 어떤 이들도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성령과 마귀, 영혼육을 말하면서 나타나는 건 온갖 시기, 비방, 다툼, 판단. 욕설을 하는 것을 보고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성경적으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함을 느꼈다. 오늘은

호루스vs예수그리스도 [내부링크]

3000년 전에 쓰인 이집트 사자의 서에는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이집트인의 내세관과 이집트의 역사, 풍습, 장례 문화에 대해 기록돼 있다. 성경에서는 출애굽 이후 사사 시대쯤 기록된 사자의 서에는 오늘날 눈만 돌리면 끝도 없이 나오는 '전시안'의 주인공이자 이집트의 메시아인 호루스라는 신에 대해 적혀 있는데 사후세계의 신인 오시리스의 아들이 호루스이며, 인간 세상에 동정녀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호루스는 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인 아놉에게 세례를 받고, 신의 아들 호루스에게 세례를 주었던 아놉은 목이 잘려 죽는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또 신의 아들 호루스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고 병자들을 치유했으며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인 아사르를 살렸다. 아사르의 헬라어 표기는 아자르스 곧 '나사로'이다. 그리고 물 위를 걸었고 그의 제자는 12명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며 3일 후에 인류의 구원자 호루스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이집트 전역에 전해졌다. 기독교인이라

멸망받을 이단 복음 [내부링크]

오늘 주일 같은 시각, 같은 시간에 이 작은 대한민국 땅떵어리 안에 수많은 교회에서 예배가 드려졌다. 어떤 교회는 "우리는 모두 의인입니다!"하며 무율법주의와 방종을 외치고 있을지 모르고 또 어떤 교회는 신유, 은사, 귀신 쫓아냄 같은 성령 집회를 열고 복 달라며 무당굿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또 어떤 교회는 율법을 쥐고 죄를 끊어내라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목사라는 샤먼 하나를 세워 놓고 교회라는 이름만 단 무속 신당들을 세상의 교회와 인연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접해보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기에 그들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이들은 성경 중심이라고, 또 말씀 중심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이단들이다.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구원파 같은 이단들은 상당한 수준의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복음과 은혜를 전혀 모르면 성경 가르쳐 준다는 그들의 미혹에 쉽사리 넘어가기 마련이다. 왜 수많은 사이비와 이단들에 고학력자, 과학자, 의사, 변호사 등 전문가들조차 빠

예수 믿음의 정의 [내부링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이 질문을 받은 각자 마음속으로 예수 믿음의 정의를 내려보자. 2천년 전에 유대 땅에 오신 예수라는 성자 하나님께서 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세뇌시키듯 "나는 믿슙니다! 믿슙니다!" 하고 의지를 드러내듯 되내이며 내 마음과 뇌리에 꾹꾹 새기고 새기고 또 새겨 놓으면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까. 대체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국어사전에 나오는 그 믿음대로 목수로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이야기를 패션오브크라이스트 같은 영화나 전래동화처럼 믿으면 되는 것일까? 이 믿음의 정의가 그리 간단하지 않음은 오늘날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이단들의 출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초대 교회때에는 믿음에다 율법주의, 할례를 보태거나 안식일을 넣거나 영지주의와 같이 다른 유대주의와 인본주의적 세상 교리를 들여와 미혹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단은 안식일뿐만 아니라 유월절을 지

마귀들의 세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들 [내부링크]

최근 연예기사에 한 방송인이 나이와 외모 악플에 대한 생각을 밝히며 화제가 되었다. "내 육체가 늙어가는 것에 대해 왜 나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욕을 하는지. 어째서 나이 드는 것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지"라며 "내가 얼굴에 뭐를 주입하지 않고 그냥 40대의 얼굴로 살아가는 것이 어째서 할머니라고 조롱할 사유가 되는지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글을 올렸다. 이어 "아, 늙었다는 말이 나에게 타격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한평생 공부하고 일하며 머리와 재능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살아온 나에게?"라며 "나는 나이 들면서 점점 똑똑해지는 내가 나는 그런 내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좋은데. 몸과 언제 작별할지 모르는데 언제 죽어 이 몸을 벗을지 모르는데. 이 귀한 내 몸을 왜 내가 싫어할 거라 믿는 거야"라고 덧붙였다. 해당 기사를 접한 수많은 사람들이 해당 기사에 응원하며 공감을 해주었고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하는 도덕이나 윤리적인 훈

지구가 하나님의 시험장이라는 말씀 [내부링크]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전 3:18-20) 그리스도인이 '나'를 사랑하는 세상 종교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요소 중 중요한 하나는 철저히 '나'라는 존재가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부분에 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 예수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나'를 자랑하는 개별 지향성이란 없다. 그리스도 예수가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인데 팔다리가 머리와 상관 없이 어떻게 개별적으로 자유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을까. (눅 12:46) 그가 그를 기다리지

운영 목적과 블로그 교회 연보에 관해 [내부링크]

이 말세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눈과 귀를 여시어 허락하시는 만큼 참복음, 참예수를 전하도록 작게나마 수고하는 주의 종입니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수많은 유튜브 설교 영상들, 온갖 성경 글들이 쏟아지는 말씀의 홍수 시대 가운데 다른 예수와 다른 십자가를 전하며 참복음을 찾지 못하고 고아와 과부의 심정으로 방황하고 해갈하지 못하는 분들을 섬기기 위해 부득불 시작한 블로그입니다. 지난 반년간 성령의 조명하심과 이끄심으로 어느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는데 거기서 말씀을 알아보신 한 형제님께서 블로그를 가르쳐달라는 댓글을 남겨주시고 마음을 받아서 이렇게 급히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커뮤니티에서 꾸준히 보고 오신 분들은 최소 수주, 혹은 최대 수개월 이상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아주 조금이나마 깨달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은혜 [내부링크]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본주의가 덮은 선악과 따먹은 이 땅의 모든 아담들은 그 본성 자체가 하나님 같이 되었다는 선악을 판단하는 놀이에 빠져 있다. 세상으로부터 주입되어 수시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온갖 생각과 감정에 분리되지 못하고 그것들에 일원화가 되는 육체에 속하여 0세에서 12세 사이에 프로그램화된 자기중심적, 자기보호적, 자기제한적, 피해의식적, 생존의식적, 이해타산적,이원론적('나'와 '너'로 분리하는 체계) 사고로 끝없이 남의 외모, 옷차림, 말투, 행동, 생각뿐만 아니라 늘어난 세상지식으로 자기자신마저도 판단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 정도면 평균 이상이지"하는 생각으로 자신은 선에 두고 남을 판단하기 시작한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어?"하며 자신을 비관하는 이들도 사실 마찬가지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

하나님을 믿는가 마귀를 믿는가 [내부링크]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쭉 같은 진리만을 말하고 있다. 성도의 교훈 목적으로 잠깐 주어진 이 역사는 인간의 타락 이후 세상이라 불리는 가인의 길과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아벨의 길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가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든 언약 가운데 택함을 받지 못한 이들이건, 모든 인간은 "응애~" 하고 태어나는 순간 죄 아래 육체에 속한 가인으로 태어나기 마련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 역사 속에서 그걸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말한다. 가인의 길이란 대체 무엇인가.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께서는자기 노력, 자기 수고, 자기 보람으로 제사를 올린 가인의 것을 거부하자 그는 분하여 동생 아벨을 쳐죽였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아주었더라면 아벨은 죽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가인이 실질적으로 살해한 존재는 아벨이

예수와 함께 죽어야 사는 성도들 [내부링크]

(창 4:16-17)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 인류 역사와 문명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성을 쌓고 개척한 가인의 후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처죽인 가인을 도리어 보호하시겠다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나 그는 하나님 앞을 떠나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일들을 도모했다. 그 후손들의 이름 뜻은 저마다 '과시하는 자', '강한 자', '정복자', '유난히 아름다운 여자' 등 세상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이름이란 이름은 죄다 취했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인본주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문명의 개척자들이었다. 현대 문명의 지배자들은 실로 가인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하나님께서는 왜 살인자 가인을 바로 죽이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면서까지 가인의 후손들을 이 땅에 퍼뜨리는 걸 허락하셨을까? (창 4:25-26

미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내부링크]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 3:18)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롬 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4) 사람은 다 거짓되되 (시 116:11)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내부링크]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위 말씀은 오늘 주일에 예배 드리는 많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르는, 또 예수를 그저 4대 성인쯤으로 여기는 세상 사람들조차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구절이다. 세상에 속한 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거의 대부분은 이런 구절들을 보고 그저 자신을 극적으로 변화시켜주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는 긍정의 명언', '이 땅에서 복 받고 잘살게 해주는 진리'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죄인으로 계속 남아 있으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게 없어. 계속 죄의 짐을 지는 죄인이 어떻게 자유로울까.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집하는 건 문제가 있다." "우리는 빛의 자녀야. 빛의 자녀가 자신을 죄인에 가둔다고? 예수의 가르침과 어긋나고 예수의 뜻을 왜곡하는 거야." "거룩한 하늘의 빛이 내 마음에 살아 있음을 깨달으면, 죄의 심상이 사라지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처럼

성경의 독자는 교회다 [내부링크]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조금 알았다고,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목회자가 말씀을 전하는데 불신자인 세상 사람들도 함께 알아들으며 똑같이 좋아하고 감동을 받는다면, 그건 과연 올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 말씀으로 분별과 찔림이 없다면, 또 세상과 구별된 깨달음이 없다면, 결코 성경을 올바로 읽는 것이 아니다. (눅 8: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희 교회에게만 허락되었다고,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명하셨던 그대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입으로만 믿는다고 시인하거나,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들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택함을 받은 믿는 자를 대상으로 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진리

성경을 표피적으로 읽으면 망하는 이유 [내부링크]

성경을 '인간중심', 그 가운데서도 '나'라는 자아를 성숙시키고 발전시키는 자아숭배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읽고 있다면, 또 그저 '나'라는 거짓자아를 구원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종교경전으로 보고 있다면 유대인들이 그러했듯 율법주의에 빠지거나 반드시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마저 판단하여 걸려 넘어지게 돼 있다. 성경은 단순히 시대적 상황만을 따져서 볼 게 아니라 인본주의와 내가 삭제된 자기부인, 자아삭제 상태에서 보아야 한다. 또 항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두고 읽지 않으면 조금도 알아먹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세오경만 읽고 "구약의 하나님은 왜 이렇게 엄해? 신약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과 완전히 다른데?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가?" 하는 세상에서 배운 감정에 끌려가 세상사람과 같은 해석만 나올 뿐이다. 인본주의를 선택한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죽였고 어떻게 오늘날까지 그분이 메시아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지 곰곰히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성경 안

종교와 타협할 수 없는 진리 [내부링크]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을 채우는 미신.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불의한 이익을 뜯어내려는 사교. 정경을 가지고 있는 고등종교를 흉내내는 온갖 사이비 종교.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저마다 탐욕스러운 인간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것들이다. 그런데 오직 기독교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시는 것으로 은혜를 말한다. 범신론인 힌두교와 불교의 목적인 해탈이나 오도 또한 쉽지 않은 개념이지만 인간이 중심이다. 그에 반면 기독교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해,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 인간이 스스로 고행을 하고 수련하여 성취하고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은혜에 이끌리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떠나서 사망의 증상들로 고통을 받는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생명력과 풍성한 복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예수 이외에 참선, 고행, 수도나 종교행위, 율법지킴, 보시, 선행 등 다른

예수로 멸망하는 자들 [내부링크]

세상이 보는 성경과 이 땅의 택함 받은 성도가 보는 성경은 달라야 한다. 성경은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세상도 말씀을 알아듣고 환호하며 우리와 함께 공감할 수가 있는가? 만약 부처가 성경을 보면 어떻게 읽겠는가? "자비를 베풀고 보시하고 이웃을 섬겨 너희 삶을 유익하고 보다 나은 것으로 쟁취해내어라."일 것이다. 공자가 성경을 읽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도덕과 윤리 잘 지키고 부모 공경하고 국가에 충성하라. 그리하면 좋은 세상이 오고 행복해질 거다"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을 부처라고 말하는 인도의 철학자 라지니쉬의 사복음서 강해는 오늘날 개혁주의 성화론과 똑같다. 산상수훈을 매일 읽었다고 하는 힌두교 신자 간디는 어떠한가? 자신은 예수의 가르침을 매일 지킨다고 말한다. 예수를 진짜 믿는다는 성도가 이해한 성경과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성경이 똑같을 수 있는가? 세상이 보는 것과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보는 진리가 같을 수 있는가? 만약 세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은혜vs자아숭배 [내부링크]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으며 오늘날 교회협이 석가탄신일을 축하하고 중들이 교회와 성당을 찾아 성탄절을 축하하는 등 저마다 종교통합을 외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모두가 진리인것처럼 말하며 다 그게 그거이니 통합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크게 보면 실상은 단 두가지뿐이다. [하나님 홀로 드러나는 오직 예수와 십자가 은혜 vs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의 자아숭배]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하에 펼쳐지는 아담들의 자아숭배 경연장이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의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자신들이 세운 선을 위하여 남을 괴롭히고 짓밟고 죽이고 올라가고 쟁취하며 자신들의 이름만을 높이려는 바벨탑 쌓기 현장. 종교, 민주화, 노동운동, 테러, 시위 등 자신들이 믿는 신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몸까지 불태워 없애버릴 수 있으며 그걸 인간들의 의이고 선이라고 규정한 인본주의 세상. 종교라는 미명하에 치러지는 온갖 의식이나 육체를 혹사시키는 선행 또한 결과적으로 복이나 내세를 위한 자아숭배로 귀결되는 행위들이

성경이 말하는 예정 [내부링크]

1. 한 죄수가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며 누가 성경을 물으면 바로 답이 나올 정도로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는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다. 2. 수많은 기독교 서적과 남들은 1번 읽지도 않는 성경을 100독 이상 읽었으나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 하는 글을 남긴 루소. 3. 당시 구약 성경에 해당하는 모세오경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며 완벽하게 외웠고 율법으로는 흠 없이 살았지만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척 보고 "메시아다!"라고 알아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위와 같은 3가지 사례로 아무리 애를 써도 믿어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세상적으로는 백신을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었듯 말이다. 어찌 됐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갈라질 뿐이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 나뉘어지는 것일까?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먼저 선악과를 따먹은

성경이 말하는 예정2 [내부링크]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도 성경이 말하는 예정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불신자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칭하는 이들 가운데서도 예정을 말하면 꼭 불편하게 받아들이는 의견이 있다. 이것이 성경이 전혀 논하지 않는 내용이라면 한 귀로 흘려들어야 할 헛소리에 불과하겠지만, 성경이 거듭 말하고 있다면, 그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힌 사람중심적인 인본주의 관점은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는 신학 지식, 배경 지식, 포스트 모너니즘, 인본주의 지식을 온통 누룩 같이 섞어 넣고 자신의 관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이럴 거야.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러이러해." 하고 말씀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결국 그 말씀을 직접 그 입으로 내뱉으신 하나님마저 불편해져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실수를 하고 말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내가 아는 그 사랑이야!",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럴 분이 아니셔!", "꼭두각시를 만드실리가 없어!", "인간이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다고!"라는 휴머니

택함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 [내부링크]

마태복음 25장에 그 유명한 열 처녀 비유에서 수많은 교회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영성을 잘 지키자.", "깨어 있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말씀 잘 지키려고 노력하며 기다리자." 정도의 교훈을 주제로 마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우선 비유를 자세히 살펴 보면 (마 25:1-5)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이어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말로 비유가 끝이 났고 주께서는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로 끝을 맺으셨다. 바로 전 장의 비유와 더불어 말세에 마치 성도들을 향해 깨어 있으라는 듯한 당부를 주시는

성도들을 죽이는 은혜의 폭력성 [내부링크]

기독교 안에서 자리잡은 교리 중 하나가 흔히 인간의 자유의지로 예수 믿고 안 믿고를 인간 스스로 정한다고 말하지만 성경 어디를 보아도 내 자유의지로 자율적으로 스스로 믿어 구원받는다는 말씀은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에 우발적인 것이 하나라도 있다고 믿는가? 전능하신 분께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들을 뒤늦게 깨닫고 수습하는 분이신가? 선악과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나서 "아고, 아담이 결국 선악과 따먹었는데 어쩌지?" 하시면서 뒤늦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은혜를 준비하셨을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왜 동산 가장 안 보이는 구석진 곳이 아니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한 그걸 동산 한가운데 두셨겠는가? 그건 먹으라는 것이다. 절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뱀의 말을 좇아 먹어 보고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바벨탑 쌓기, 하나님 흉내내는 인간군상들의 역사를 뼈저리게 이 땅에서 다 겪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의 택함 받은 성도들은 그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들이 겪을

성도들을 죽이는 은혜의 폭력성2 [내부링크]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선악과를 입에 물고 태어나는 이 땅의 아담들은 반드시 에피두미아(선과악)라는 두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말씀과 율법마저 스스로 판단하게 돼 있다. 당장 이 게시물의 제목만 볼 때도 스스로 선악으로 판단하여 "폭력이라는 제목부터 흠이네."라든가 아무리 작정하심에 대한 말씀과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와 같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지는 전능자의 말씀이 수없이 주어져도 "우리 하나님은 그럴 리가 없어. 예정론은 하나님을 악하게 만드는거야."라고 스스로 말씀을 판단하고 선악을 규정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루아흐(=하나님의 영, 생기) 없이는

영원을 함께하는 천상의 교회들에게 [내부링크]

(엡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롬 8:28-30)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성경에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백성들을 미리 예정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 [내부링크]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동일한 진리만을 전하고 있다. 똑같은 말을 다른 게시물에서부터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고 복음이기 때문이다. 예수 말고 다른 진리를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진리 어디에 인간의 자유의지로 예수 믿고 안 믿고, 구원을 받고 안 받고 인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말이 있는가? 유튜브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환호하는 50만, 100만 이상 조회수가 나오는 목회자들의 휴머니즘, 인간미 넘치는 설교를 보라. 그 영상들 가운데 그들이 강조하는 것이 결국 끝으로 가면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로 인하여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로 사랑을 해보겠다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으로 성화와 거룩을 이루어보겠다는 허황된 망상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에는 "택함 받은 소수만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이라면 실패자다!" 말하며 하나님을 판단하고 삿대질하는 교만한 목회자의 영상도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큰 충격이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판단하고

마귀를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내부링크]

(느 9:18) 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 애굽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직접 체험하며 두 눈으로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신을 만들었는데 그 유명한 금송아지 사건이다.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 이들은 금송아지를 여호와라 하고 하나님으로 여기며 숭배했는데 금송아지는 자신들이 나온 이집트의 풍요의 신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만든 그 풍요의 신의 다른 이름으로는 '바알'이라고도 불렸다. 이스라엘이 숭배한 모든 신들의 근본은 나의 배 곧 '나'이다. '내 풍요', '내 자랑', '내 인기', '내 가족', '내 일상', '내 꿈', '내 비전', '내 안전','

인간의 믿음을 기각시켜버리는 하나님 [내부링크]

예정이라는 개념하에서 피예정자의 모든 능력과 시도, 열심, 수고, 노력, 애씀 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예정 앞에서 모든 피조물의 힘과 기능, 열심, 지혜가 무용하다. 하나님의 예정은 구원의 은혜성,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열심, 구원의 무조건성을 함의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예정을 비난한다. "그럼 악도 하나님이 조성하신다는 것인가?" 하고 감히 하나님께 반기를 든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가룟 유다를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만드셨는가?"하는 이 땅의 모든 가롯유다들이 하나님의 결정에 분개한다. 선악과 입에 문 피조물들이 "다 예정됐다고? 그럼 우린 뭔데?!" 하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삿대질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뭐긴 뭐야? 니들은 다 악이야! 자기 의야! 위선이야! 마귀자식들이야! 너희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너희들의 처음 자리, 원래의 자리, 자궁의 자리, 핏덩이의 자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성도 [내부링크]

며칠 전 한 블로그에 올라온 열 처녀 비유에 관한 큐티를 보면서 한 교회의 설교 내용을 더하여 "기름은 각자의 삶을 상징하기 때문에 자기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로 결론을 내린 내용을 보았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기름 받은 모습,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 하나님의 성품을 자연스레 드러내게 돼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는 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더 많고 무엇보다 "자기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로는 더더욱 가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삶을 책임질 수 있다면 예수께서 내려오시어 십자가를 질 이유는 없다. 또 예수 판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하고 자결한 가롯 유다는 절대로 멸망의 자식으로 남아서는 안 됐다. 그러므로 성도는 절대로 "자기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로 가서는 안 된다. 성도는 죄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자들이다.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죄라는 것이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얼

많은 기독교인이 오해하는 성경 구절 [내부링크]

다른 게시물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 이외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성경 구절을 복음에 맞게 전하고자 한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교회 주일 설교에서 틈만 나면 열심주의 율법으로 돌아가게끔 만드는 구절 중에 하나이다. 마치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으며, 택함과 예정의 말씀과도 대립을 보이듯 버림을 당할 수 있다는 이러한 구절을 성도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먼저 고린도전서 9장 전체와 뒤에 10장까지 문맥 전체를 살펴보아야 한다. 또, 그 버림을 당한다는 구절이 사도의 다른 서신서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큰 틀을 보면 역시나 "예수와 십자가 은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고전 9:1-4)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성령충만한 삶이란 [내부링크]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성령 충만'이다. 성령 충만을 두고 그저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능력을 보여주고 방언하고 예언하는 특별한 능력 정도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령이란 곧 하나님의 영이며 성령 충만은 곧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뜻이다. 십자가로 향하신 예수의 삶이 나타나는 신령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고전 2:11-14)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

부자는 왜 지옥에 떨어졌을까? [내부링크]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 부자와 거지 비유를 한 대상은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에 한가운데 있던 바리새인들이었다. (눅 16: 13-14) 종이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탐욕스런 바리새인들도 이 모든 것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거늘 -> 바리새인 바리새인 하면서 늘 남 이야기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을 몰랐던 인본주의에 속한 인간군상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바리새인은 인본주의에 대표로 선 자들일 뿐이다. 예수 믿기 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라는 맘몬을 섬기게 돼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공이며 자기중심적 자기보호적 자기제한적 생존의식 피해의식과 같은 다섯가지 체계로 자신과 자신의 모든 관계를 선악으로 규정한다. 이해 관계에 따라 내 편, 네 편으로 파당을 나누고 내가 선악의 주체로 '나'가

요한복음의 택함과 예정 [내부링크]

다른 세 복음서가 공통된 관점에서 유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공관복음서인 것과 다르게 요한복음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알리고 명시하는 복음서이다. 요한복음의 첫장과 마지막장, 또 전체적인 흐름을 모두 살펴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끝남을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한 목적으로 7가지 표적만 추려서 기록한 요한복음의 첫장만 간단하게 살펴 보면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먼저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구약에서 떠오르는 부분이 있음을 쉽사리 유추할 수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되는 창세기 1장이다. 요한복음의 구조는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안식까지 이르는 부분과 유사한 구조를 하고 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내부링크]

하나님, 하느님, 창조주, 창조신, 여호와, 엘로힘, 알라 등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수많은 말들이 있고 정체성을 드러내듯 여러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만 그 이름만으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다 담을 수도 없으며 피조물인 인간으로서는 감히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정의할 수도, 포착할 수도, 감지조차 없다. (롬 1:18-2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 하지만 우리 자신을 포함한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보여 알려졌기에 모든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신 인식이 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현대인들도 "신은 있을거야!"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죄를 나열하는 사도 바울이 갑자기 찬송한 이유 [내부링크]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실패 가운데 은혜, 곧 예수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이스라엘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부재 상태에 이스라엘의 한 지파 안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만행이 벌어지는 둥 사사기는 우리의 모습이나 다름 없는 인간의 악함을 끝없이 폭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너희를 살릴 수 있음을 말할 뿐이다. 사사기에서 인간들의 무력함이 폭로당하고 이후 룻기에서 남편과 아들들을 모두 잃은 과부 나오미와 나오미의 며느리인 이방 여인 룻을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덮어버리는지 자세히 그리고 있다. (룻 3:1-5)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첫 표적 가나의 혼인 잔치의 진의 [내부링크]

오직 복음만을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 중 첫번째 가나의 혼인 잔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요 1:35) 또 이튿날 요한이 (요 1:43) 이튿날 예수께서 -> 요한복음 1장을 기준으로 이튿날, 이튿날, 이튿날을 기준으로 (요 2:1-2)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 사흘째 되던 날, 곧 전체적으로 보아 일곱째 날에 해당하는 날에 기쁨의 혼인잔치가 열렸다. 사흘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 후 부활을 상징하는 숫자이며, 일곱은 창세기 1장에 해당하는 일곱째 날로 곧 안식을 뜻하는데, 즉 참 기쁨의 혼인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뿌려져야 완성됨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인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안식으로 들어가게 되는 상징적인 표적이기도 하다. (요 1: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밀실에 들어가는 택함 받은 성도들 [내부링크]

(삿 3:12-16)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 구약 성경은 예수와 십자가 은혜 말고 다른 걸 설명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 때와 마찬가지로 악을 행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압 왕 에글론이라는 엑스트라를 강성하게 하시며 준비하신다. 에글론의 뜻이 '송아지'인데 '금송아지', '풍요의 신 바알'

들을 귀 있는 택하신 족속 [내부링크]

(요 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고전 15:35-38)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성경은 요한복음을 보든 마태복음을 보든 고린도전서를 보든 창세기를 보든 요한계시록을 보든 어디를 펴도 전부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예수와 십자가 은혜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않는다고, 그 동일한 길을 가신 하늘로부터 온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다른 그림

자기 백성의 세계를 빼앗는 하나님 [내부링크]

성경의 독자는 교회이다. 하나님 백성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보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걸 배우는데 하나님 백성이 아닌 외인들은 율법, 도덕, 윤리, 종교 경전, 이스라엘 역사, 사람 이야기, 인물 이야기, 소설 정도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다른 종교 경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받아들일 뿐이다. 위에 누가복음 말씀도 믿음 없는 가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위해 내 소유 다 버려야지! 다 버려서 하늘에 상 차곡 차곡 쌓아야지. 믿음이 있는 행함!" 하고 곧바로 '나'를 위한 율법으로 받아들이며 달릴 생각을 하지만 은혜 가입한 그분의 백성들은 오히려 "다 버리지 못하는 내가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고 애통하고 통곡한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고 예수를 찾으며 애가를 부를 줄 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그들이 믿음이 있는 진짜 행함을 내놓는다. (살후 3: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세상이 보여주는 진리란 [내부링크]

체형이 다른 쌍둥이가 있고 체형이 같은 쌍둥이가 있다. 왜 같은 쌍둥이인데 이렇게 다를까? 전문가에 따르면, '제2의 게놈'이라고 불리는 장내 미생물 마이크로바이옴의 조성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살찌는 형질로 변할 수도 있고 살이 안 찌는 형질로 바꿀 수도 있다고 한다. 한때 유행한 유명 먹방 유튜버라고 신장 160cm 정도에 몸무게 48kg로 왜소한 체격의 젊은 여성이 하루 10000킬로 이상 먹지 않으면 살이 빠진다고 개인 방송에서 밝혔는데 가벼운 스트레칭을 제외하고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혹시 몰라 한 번 받아본 건강 검진 결과가 모두 정상으로 나왔다. 심지어 위 크기도 남들과 차이 없는 보통 크기라고 밝혀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살이 찌지 않는 체질에서 에너지 소모를 일으키는 변인으로 기초대사량과 활동대사량이 있고 체내 효소, 장내 유익균의 활성화 정도 등이 원인으로 작용하는데 『칼로리의 거짓말』 저자 조나단 베일러에 의하면 "당신이 먹는 음식과 양은 의지나 취

성경이 말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내부링크]

이만희, 안상홍, 유재열, 박윤식 등 다 자기들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이다. 자칭 재림 예수만 해도 한국에만 족히 3천 명이 있다고 한다. 얼마 전 세간에도 큰 화제가 된 넷플릭스발 사이비 이단 JMS 정명석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곳들에 최소 수만 명씩 붙어 있는데 이해가 가는가? 일자무식 그런 사람들만 붙어 있는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도 많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았다고 하는 JMS 정명석만 하더라도 예수가 가난한 목수의 모습으로 오셨으니까 초졸이라도 학력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무슨 베일에 감추어진 신비한 인물로 스토리를 만들고 그가 신비주의처럼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고 암을 낫게 해주고 또 성경을 2천번 이상 읽었다며 온갖 이야기들이 나돌자 서울대를 기점으로 수많은 대학에 동아리도 생겨 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몰리더라는 것이다. 그가 기도하여 진짜로 드문드문 암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실제로 나오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성경 해석에 그리 많은 사

마라의 쓴물에서 단물이 되는 성도들 [내부링크]

(요 12:1-2)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엡 2:5-6 새번역)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 교회를 모형하는 사랑 받고 은혜 입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자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다. 에베소서 2장 5-6절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이 범죄로 죽은 우리를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다. 시제로 과거 완료이다. 이미 앉혔다. 계시록을 보면 사도 요한이 묵시속에서 인간들이 쌓아 올린 이 바벨론 세상의 멸망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다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는 성도들 [내부링크]

마라의 쓴물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단물을 내는 마리아인 성도들이 세상에 속하는 가룟 유다로부터 핍박당하는 말씀을 지난 게시물에서 자세히 나누었다. 이런 말씀으로 그저 세상 사람들과 별로 사이가 안 좋으니까 무턱대고 "아,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세상으로부터 핍박 받네." 하지만 말고 먼저 성도 안에 있는 가룟 유다라는 옛사람을 잊지 마시라. 성도는 밖에서부터 핍박만이 있지 않고 그에 앞서 성도 안에서부터 "네가 그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 맞냐?" 하는 핍박이 선행된다. 안에서부터 영적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요 12:4-5)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라는 예수를 잡아 줄 자가 막 복음을 알기 시작한 마리아를 핍박하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군상의 대표하는 인물로 나오지만 (마 26:8-9)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구원 받으려고 예수 믿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 [내부링크]

한 일타강사가 한국의 저출산 원인을 가리켜 인스타 허세 때문이라고 공개적으로 저격하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다. 또 60만 이상의 조회수를 돌파하는 등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우리 때는 오마카세라는 단어가 없었다.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우리나라에 페라리가 한 대도 없었다"면서 "그때는 다 못살았는데 아기는 많이 낳았다. 지금은 다 잘 사는데 왜 아기를 안 낳을까? 그게 '인스타그램'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또 그는 "근데 나만 불행한 것 같고, 나만 애를 잘 못 키울 거 같거든"이라며 "생각해보니까 아무리 벌어도 호텔에서 애들이랑 못 놀아 줄 거 같거든. 하룻밤에 100만원이 넘는데 아이를 어떻게 놀아주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스타그램을 믿지 말자. 인스타그램 없던 시절이 최고의 시절이었다"고 덧붙였다. 흔히 베이비붐 세대라고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걸쳐서 태어난 세대를, 우리나라에서는 1955~1963년에 태어난 세대를 이른다. 한 반에 학

한 번 구원은 영원한가 아닌가 [내부링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처음 완독했을 때 심히 감격에 빠진 기억이 있다. 성도라면 성경의 어느 구절이 되었든 누구라도 한 번쯤은 그 말씀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평생 보던 소설이나 영화드라마의 그 어떠한 엔딩보다도 더한 벅찬 감격을 경험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다시 올 주 예수를 향한 소망. 깨어 있는 성도라면 언제라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이것이 부활 신앙, 더 나아가 마라나타 신앙을 가진 성도들의 자세라는 것 또한 말씀을 깨달을수록 천천히 와닿게 되었다. 그렇게 성경을 완독하고 같은 감동을 받은 형제들과 교제하고 싶어서 매주 예배드릴 교회도 알아보았고 인터넷, 유튜브에 떠도는 수많은 설교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며 돌연 의문이 생겼는데 성경 말씀을 나누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전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중

영어로 번역된 블로그입니다 [내부링크]

(고후 8:4-5)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고후 8:7-9)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10-15)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

주와 함께 죽으러 가는 성도들 [내부링크]

(요 11:1-4)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요한복음의 일곱 번째 표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의 서두이다. 전 장에 주께서 성전 안에 계실 때 돌로 쳐죽이려는 율법주의 인간 군상들과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 손에서 유유히 벗어나신다. 그리고 주께서 어디로 가시냐 하면 성전 밖 광야와 요단강 저편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며 회개와 은혜만을 외친 세례 요한의 세례 베풀던 곳으로 가시는 내용에서부터 11장 나사로 이야기의 서두가 이어지고 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으라 [내부링크]

(엡 1:16-23)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이기도 한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이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

중요한 것은 꺾여야 하는 마음인 성도들 [내부링크]

'중꺾마'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리그 오브 레전드 2022 월드 챔피언십에 참가한 어느 유명 프로 게이머가 남긴 유행어로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포르투갈전에서 승리하며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쓰여진 태극기를 들면서 이 말은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중꺾마'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정신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우리 사회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2022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쓰인 유행어인 '중꺾마'를 통해 세상은 "나도 꺾이지 않을래요." 하고 꺾이지 않으려고, 꺾이지 않고 어떻게든 이기려고, 꺾이지 않고 쟁취하려고, 꺾이지 않고 내 밖에 다른 경쟁자들을 다 쓰러뜨려서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올라가고자 한다. 설사 이기지 못하고 올라가지 못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내 가치라는 자존심만큼은 챙기고자 한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라도 절대로 꺾이지 않고 하나님 자리에서 끝까지 내려오

하나님의 라인 vs 마귀의 라인 [내부링크]

(요일 3:8-12)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약 5:6)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 연출의 대하드라마라는 이 역사가 하나님 백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성경을 일독만 제대로 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만 그들이 거의 맞아죽는 방향으로 나타

그리스도를 구해야 하는 성도들 [내부링크]

맹인을 낫게 함으로써 또 한번 안식일에 표적을 행하시어 세상에 있는 진짜 맹인들의 모습을 확 폭로시키고자 하신 하나님의 일 가운데 재차 죄인들의 실상이 드러난다. 말씀을 던지면 은혜 받을 자리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그걸로 항상 나를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이 마귀의 자식들이다. 이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만나면서 그를 통해 자신들의 실상을 보게 된다. (요 9:13-24)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좁은 문,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성도들 [내부링크]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눅 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주님께서는 복음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종종 양으로 비유하신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고는 파견하시는 제자들 또한 양으로 비유하셨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심지어 주님 자신조차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계 13:8)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계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

수전절의 민속메시아와 이를 기각하는 참 메시아 [내부링크]

(요 10:22-24)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렀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160여 년 전 유대교와 전통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아니꼽게 여긴 수리아의 왕 인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헬라화를 강제화시키고자 예루살렘에 헬레니즘 문화를 들여와 성전을 더럽혔다. 율법에서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게 하고 사내아이들의 할례를 금지하며 안식일 준수를 막는 등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반면 훗날 사두개파로 현실주의 교파의 뿌리가 될 헬레니즘 문화에 유화적인 유대인들은 이 조치에 반감을 가지지 않았고 이와 대조적인 뼛속까지 유대교에 충실하고자 한 유대인들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그러나 당시 대제사장 야손과 그 자리를 빼앗고 대제사장이 된 메넬라오스마저 당대 대세인 헬레니즘 문화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미운오리새끼로 오신 예수와 각기 제 길로 간 성도들 [내부링크]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탄하는 미운오리새끼 "난 태어날 때부터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못생긴 걸까? 이런 나라도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기는 할까?" <미운오리새끼> 우연하게 일본의 한 창작물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흔한 클리셰에 한국의 네이버 웹툰에서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알려진 '외모지상주의'라는 웹툰과 무척 비슷한 소재로 시작하는데 형편 없는 외모의 한 고등학생이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당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학교 안에서는 매일 놀림과 구타를 당하기 일쑤이고 심지어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세탁기에 한 옷을 같이 빠는 일조차 혐오를 당할 정도로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돌아가신 할아버지만이 그에게 유일하게 살아갈 희망을 주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온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지 않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모처럼 태어난 이상, 조금은 누군가의 도움이 될 수 있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 하고 싶다..." <작중 대사> 돌

벧엘의 하나님께로 [내부링크]

(요 1:49-51)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 (갈 3:23-24)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뜻하는 나다나엘이 율법이라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음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기 시작한 우리 성도들 또한 모두 처음에는 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사는 성도들 [내부링크]

(롬 2:12-15)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 뭐가 율법이 된다고 성경은 말하는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 아담 안에서 이미 선악과를 입에 물고 태어난 시점에서 육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의 구분을 스스로 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인간의 속성을 우리는 '어질 량良', '마음 심心' 자 해서 '양심(良心)'이라고 부른다. 국어사전에서도 '양심(良心)'을 가리켜 "사물의 가치를

하나님처럼의 그 자리를 추구하는 가짜 기독교 [내부링크]

인간은 나의 과거, 나의 행위를 들고 나를 규정한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형식화해서 "요게 나다!"하고 정의해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진짜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말씀에 포착당하여 하나님 자리에 올라선 죄인으로 폭로당하여야 할 진리와 상관 없이 그저 자기 행위에 근거하여 스스로 형식화해버리는 것이다. 합리화해버리는 것이다. 나를 조작해버리는 것이다. 그게 이 거짓된 세상에서 프로그램화된 모든 인간의 자아 형성 과정이다. 그런데 인간은 카오스라는 혼돈 속에서 살고 있는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이다. 따라서 늘 변화에 노출이 돼 있다. 평생 자신의 과거 행위만을 가지고 애써서 "요게 나다!" 하고 자신을 규정하고 형식화해 놓았는데 외부에서 갑작스러운 변화가 주어지게 되면 인간은 곧 자신의 행위 수정에 들어간다. 그것을 메타형식이라고 부른다. 메타가 '초월하다', '넘어서다'이다. 그렇게 외부 변화에 의해 자기 행위 수정에 곧 들어가는데 그 메타형식이 바로 우상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실감하는 성도들 [내부링크]

전세계가 로마 카톨릭에 넘어갈 때 라틴어로 되어 있어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며 종교개혁의 가장 중심에 서 있던 마틴 루터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로마카톨릭의 폐단과 인간인 교황을 부정한 까닭으로 로마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였고, 자국의 황제로부터 추방당하여 이제 법적으로 누가 그를 살해하거나 상해하여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 방랑자, 외국인, 국적 없는 나그네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절대 다수에 속하였던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성경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대표하여 이와 같은 인물들이 창세기부터 등장한다. (히 11:8-1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성도들을 비추시는 빛 [내부링크]

(요 9:39-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성경에서는 앞 못 보는 소경을 가리켜 죄인들을 총칭하는 단어로 자주 쓰인다. 복음서에서도 유독 소경들을 고친 사건을 특별하게 많이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귀먹은 벙어리 고친 사건 1번, 중풍병자 고친 사건 1번, 열병앓은 병자 고친 사건 1번, 문둥병자 고친 사건 2번,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 사건 3번, 그런데 소경 고친 사건만 유독 5번이다. 요한복음에서도 나타나듯 성경은 특별히 소경을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죄인들의 상태임을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런 영적 어둠 상태에 빠져 있는 죄인들을 주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을 광명한 빛으로 인도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내부링크]

선악과 입에 물고 태어난 이 땅의 모든 아담들은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해 반드시 선악을 육체로 판단하게 돼 있다. (요 6:28-29)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그래서 예수께 가서 즉시 행위를 요구한다.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는 율법을 요구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고.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선의 존재로, 곧 그럴 자격이 있는 자신을 먼저 믿고 요구하는 것이다. 거기다 대고 주님께서 인간들의 선악 판단을 기각시키시듯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야." 말씀하신다. 자신들이 뭔가 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들의 시도부터 부정하신다. "너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너희는 원래 은혜 받을 존재이지, 하나님의 일을 너희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여 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존

세상을 소멸시키는 성령의 불 [내부링크]

이 세상은 정확하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은혜 받은 세상과 그렇지 못한 세상으로.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행실을 두고 "저런 인간들이 믿는 예수가 진짜일리가 없지." 하는 것도 딱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들과 뭔가 달라서 은혜 받은 게 아니니까. 거기다 가라지들이, 웬 가짜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수시로 예수를 들먹이며 강력 범죄를 저지르질 않나, 복음 전하는 것보다 정치에 더 기웃거리거나 사회 개혁에 앞장선다거나, 종교 놀이에 빠져서 사람 머릿수 늘리려고 건물 크게 짓고 돈을 쌓아둔다거나 하는 짓을 서슴지않고 행하고 있다. 세상과 똑같이 자기 배 채우기라는 목적으로 하나님마저 도적질하고 팔아먹고 있으니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이단 사이비들까지 더해졌다. 복음 전하기 이 얼마나 민망한 시대인가? 하지만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분의 백성은 반드시 회개하여 다시 돌아오게 돼 있다.

하나님의 뜻 vs 사람의 뜻 [내부링크]

창세기 1장의 빛이 무엇이었는지 풀이하는 요한복음 1장부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가나의 혼인 잔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믿음을 선물하신 두번째 표적,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세번째 표적, 오병이어와 물 위를 걸으시는 표적까지. 그리고 6장에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는 주님의 선포와 오병이어 표적의 진의까지 모두 십자가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복음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인간들의 자유의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열 둘만 남기고 끝난 것이 요한복음 6장이었다. 마귀마저 정하셨다지만, 역시나 은혜에 의한 택정이다. 앞장에서 그려졌듯, 내 뜻대로 내 배 채우려고 내 유익 바라보고 이 땅의 것을 구하러 온 자들은 모두 예수를 떠나게 돼 있다. 자신들의 풍요를 위한 애굽의 신 금송아지를 두고 "저게 애굽에서 우릴 건져낸 여호와다!" 외친 이스라엘 조상들처럼 자신들이 상상하고 만들어낸 엉뚱한 신을 좇게 돼 있다. 결국 나 자신을 좇게 돼 있다. 자아숭배 하게

때와 시기를 정하시는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내부링크]

(왕상 11:11-13)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 은금 많이 쌓지 말고, 병마 많이 두지 말고, 아내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솔로몬. 자그마치 1000명이 넘는 많은 아내를 두어 그들로부터 온갖 이방의 우상들을 들여와 제사한 솔로몬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10지파가 그의 신하 여로보암의 손에 주어진다는 예언의 말씀이 떨어졌다. (왕상 12:21-24)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펄펄 끓는 지옥의 도가니 한복판에 선 성도들 [내부링크]

(요 8:1-5)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진리의 말씀 선포로 세상이 두 무리로 쪼개지는 혼란 속에 예수께서 감람산으로 가셨다. 감람산은 주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며 휴식을 취하시던 곳으로 최후의 만찬이 있은 뒤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공생애를 마감하는 기도를 하시고는 무리에게 체포되신 장소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신 신성한 곳이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재림하실 장소로 암시되는 소망의 산이기도 하다. 감람산의 겟세마네는 히브리 말로 '갓쉬마님'으로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이 있기도 하다. 구약에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루

진리의 말씀으로 빛과 어둠을 자각한 성도들 [내부링크]

(요 8:12-13)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 성전에서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 던지러 온 무리를 한 자리에서 심판하신 주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세상을 가리켜 사망의 어둠이라 거침없이 선포하신다. (요일 5:19)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엡 2:2-3)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세상의 빛이신 예수를 따르는 자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음이란 곧 생명이신 예수 밖에 온 세상이 전부 공중에 권세 잡은 악한 자 안에 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내부링크]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하는 넷플릭스발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이단사이비들. JMS 정명석, 오대양 박순자, 아가동산 김기순, 만민중앙교회 이재록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놀랍게도 그들 모두 하나 같이 '사랑'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현상을 눈에 보이는대로 자기 선악 체계 하에 육으로 판단하는 아담들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에 자기들만의 달콤한 의미를 담아 낸다. 마치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자연이라고 규정하고 합리화하듯, "나한테 이렇게 이렇게 잘해주면 그게 사랑이야." 하고 자기들만의 사랑을 상상하고 조작하고 만들어낸다. 세상에 속한 이들과 하나님을 몰랐던 우리도 다 그러했다. 성공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한 이 세상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그래서 수 틀리면 처음에는 사랑한다고 고백한 커플들이 조금만 맞지 않으면 즉시 다투고 헤어지거나, 처음에는 좋아서 결혼했는데 아내가 출산 후 장애를 가지자 즉시 이혼해버리더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조건과

양문과 심판의 문에 선 38년 병자였던 성도들 [내부링크]

요한복음의 첫번째 표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혼인 잔치가 완성이 됨을 보여주었다. 예수께서는 관원인 니고데모를 향해서는 "위로부터 거듭나라" 하는 명령과 함께 인간 측의 모든 수고와 열심을 부정하는 복음을 다시 설명하셨다. 사마리아로 행차하시고는 평생 자기 행복을 찾아보겠다고 이 세상의 힘과 가치인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시온산 운운하면서 여전히 율법에 묶여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구원이란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야." 하고 또 한번 은혜를 설명하셨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의 근원이자 참 남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소개하시면서. (행 1:6-8)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예루살렘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 [내부링크]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태초에 계신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이 인지하고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창조에 앞서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했다. 영원 전에 계신 그 형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게 성경이다. 우리는 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골 1:14-15)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본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아들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 선재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런 말씀들을 곡해하여 예수

오병이어의 복음과 저주의 바다에 빠져 죽어야 했던 성도들 [내부링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첫번째 표적. 공간을 초월하여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믿음을 하사하신 두번째 표적. 베데스다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세번째 표적. 그리고 오늘은 5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요한복음의 네 번째 표적과 물 위를 걸으신 다섯 번째 표적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요한복음 1장부터 38년 병자를 고치신 5장까지 우리는 모두 은혜라는 것을 배웠다. 오병이어와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 역시 마찬가지로 은혜의 복음만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유월절만 되면 마을 곳곳에 누룩이 들어간 제품들을 불에 태우거나 식기구들을 길거리에서 소독한다. 위생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식기구에 누룩이 물어 있을 수가 있음을 우려한 탓이다. (출 13:6-7)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이레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며 네 땅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 아니하게 하라 -> 예수가

게시중단 신고를 받고서 [내부링크]

성경 이야기, 기독교 이야기, 기독교 교리에도 저작권이 있다면 명예훼손, 기타권리 침해로 신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만이 유일하셔야 마땅하다. 그런데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집단의 교리와 달라서 신고를 했다? 소속 종교집단의 명예를 훼손해서? 아니면, 이미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고, 이제 차등 상급을 받기 위해 착실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구원파인데 자기를 부정하는 글이 꼴보기 싫어서 신고했다?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이 예정하고 택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말고는 내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나야!" 하고 평생 굳게 믿어온 자신의 신조가 기각당해서 피해를 주장하고 신고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또 하나님께 맡기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을 신봉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이 나서서 자기 눈에 보기 불편하고 귀에 듣기 싫은 소리를 날려버려야 한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씀은 절대로 찾을 수도 없고, 보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마리아 여인 [내부링크]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측에서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일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함이 개혁주의가 말하는 '전적 타락'이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모두 일어나 그중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설교했다. 그때 3천명이 돌아왔는데 이제 막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들의 반응이 어떠했는가? (행 2:36-7)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 사도 베드로가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아야 해.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 하자 그들이 "진짜 우리가 예수 죽였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반응을 보였다. 도무지 방법이 없을 때 나타나는 이 마음,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내부링크]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예수께서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그 날에 적은 사람도, 적당한 사람도 아니라, 많은 사람이 심판대 앞에서 "나 목사 노릇 했는데요? 나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 내고 병도 낫게 하고 많은 사역 했는데요?" 외치면서도 한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

구원 받는 자는 적다 [내부링크]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 하는 이들을 자기들 제사를 지키겠다고 하는 자들이 성전에서 쳐죽였다. 오늘날은 어디에서 죽이겠는가? 말씀 전하는 교회에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하는 자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고 따르는 자들을 때려죽인다. 그것이 역사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정확하게 이 모양으로 가고 있다. 한국 교회를 방문하면서 이 그림을 분명하게 보았다. 정확하게 다 맞아 죽고 있다. 종교인들에게 참 진리가 전해지면 그 종교인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모조리 맞아 죽는다. 그 분명한 예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그래서 성경이 목숨 걸고 십자가의 도, 진리의 도, 믿음의 도를 지켜라 그게 선한 싸움이고 이기는 거라고 성경 전체에 걸쳐서 외치고 있다. (마 7:13-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생수의 근원을 찾은 사마리아 여인 [내부링크]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타난 은혜의 하나님. 또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 성도에게 나타난 은혜의 하나님. 그 은혜의 복음을 지난 요한복음 말씀에서 다시 이어가고자 한다. (요 4:28-30)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야곱의 우물에 왔는데 거기서 진짜 생수인 예수를 만나자 야곱의 우물까지 애써 가져온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시작한다. 그날 원래 목적인 자기 육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늘 '남의 발꿈치를 잡아야 하고 속여야 하고 뒤를 쫓아야 한다는 의미의 이름인 야곱'의 우물에서 하나님의 원수에게 자기 발꿈치를 주어 상함을 받으시고 속임을 당하시고 뒤를 쫓기시어 끝끝내 그 원수를 살리는 진짜 생명을 만났다.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

회개할 기회도 없이 비명횡사한 성경 속 부부 [내부링크]

히브리 문학에는 카이즘 구조라는 것이 있다. 가운데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앞과 뒤에 동일한 것이 양쪽으로 핵심을 가리키는, 즉 샌드위치 구조 혹은 햄버거 기법이라고도 오늘날 에세이 쓰기 학습법에서 자주 거론되는 그것이다. 히브리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완성한 성경은 이러한 카이즘 구조로 점진적으로, 또 점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은혜라는 하나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은 해석하기 난해한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한 사람의 탐욕과 소유의 죄로 말미암아 구약의 여호수아 7장에 일가족이 심판 당한 아간과 유사한 사건이 은혜 시대라는 신약 사도행전에서도 고스란히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다. 이전 게시물들과 마찬가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간 등은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했다."로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겠으나 교회에게 깨달으라는 하나님의 치밀한 의도 하에 이 안에 숨겨진 복음의 메시지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먼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전후 사

흥하여야 할 그리스도와 쇠하여야 할 성도들 [내부링크]

(약 1:17-18)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거듭남을 사도 야고보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낳았다는 말로 다시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는 아들을 해산하는 것이며, 또 사도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 이를 속사람, 새사람이라고도 표현한다. 또 아들이라고도 하며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라고도 말한다. 즉, 이 땅의 성도들은 저마다 그리스도 예수를 품고 있는 작은 예수들인 셈이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은혜의 복음이 떨어졌을 때 분노하는 세상 [내부링크]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은, 성경은 오직 영원 전에 택함을 받은 교회가 수신자다. (롬 16:25-26)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엡 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엡 3: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고전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

행위구원론 vs 구원파 [내부링크]

1. 전자는 예수를 믿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감을 말한다. 성경에도 나타나는 할례파 이단과 안식일 이단들처럼 십계명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등을 시도하고 "이게 구원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야." 하고 구원받은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보려 한다. 예수를 힘 삼아 다시 한번 세상과 똑같이 자기 의를 쌓기 시작한다. 성경에서 성도가 남겨야 할 행위란 어떠한 행위로도 구원에 보탤 수 없다는 자기부인의 열매 말고는 없다. 그 자기부인조차 하나님께서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는 일이기에 마태복음에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오는 양처럼 인간의 행위 가운데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어야 한다. 심지어 행위구원론을 따르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여기기에 다시 무거운 율법의 짐을 짊어지며 스스로 판단하는 정죄에 빠진다. 마찬가지로 같은 잣대로 타인을 모든 율법을 근거로 비난한다.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착한 일하고 열심부리는데, 너흰 뭐야?"하고 남들과 비교

귀신의 처소에서 건짐 받은 성도들 [내부링크]

필자는 여타 식구들과 다르게 어린 시절 때부터 유난히 악몽을 자주 꾸었다. 식구들은 아무렇지 않게 보는 납량 특집이나 무서운 드라마, 공포 영화를 보면 늘 혼자 두려운 마음에 밤에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잦았다. 이후 성인이 되고서도 종종 가위에 눌리며 벌떡 일어나는 일도 많았다. 특별히 어릴 때 쥐나 메뚜기가 출몰하는 기이한 집에서 머물 무렵에는 부모님의 침대 옆에서 요를 깔고 눕고는 날밤을 새듯 잠을 청하다가 심하게 가위에 눌린 적이 있었는데 악한 영에게 사로잡혔다. 그렇게 붙잡히고는 밤새 침대 밑으로 잡고 끌고가려는 귀신과 씨름하듯 끙끙 대며 벗어난 일도 있었다. 만약 지옥이 존재하고 저러한 귀신들이 항상 붙잡고는 영원히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고 했을 때 거기는 절대로 가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 날이었다. 이후 주님과는 거리가 먼 세상의 문화와 음란에 빠졌을 때는 나를 덥석 안고서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귀신으로부터 고백을 받는 등 기이한 일도 있었는데 연예인

하나님마저도 조작해버리는 인간들 [내부링크]

순교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찾아가서 완전히 그의 존재를 부인시켜버리는 걸 순교라고 한다. (시 69:26) 무릇 그들이 주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욥 16:7-8) 이제 주께서 나를 피로하게 하시고 나의 온 집안을 패망하게 하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욥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호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고전 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후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고후 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의 진의 [내부링크]

(레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20:13)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신 23:17-18)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이 있지 못할찌니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왕상 14:24)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왕상 15:12)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 (왕상 22:45-46) 여호사밧의 남은 사적과 그 베푼 권세와 그 어떻게 전쟁한 것은 다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저가 그 부친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

아들을 낳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내부링크]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이란 곧 구약 성경이다. 구약 성경은 곧 예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인데 만약 구약 안에서 예수를 찾지 못하고 온통 율법만 찾고 있거나 도덕과 윤리, 혹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 대한 역사만 찾아내고 있다면 주님의 말씀과 위배되며 유대인들처럼 완전히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구약에서 예수를 찾아야 한다. 이 구약에 대한 이해가 예수로 나타나지 않으면 신약을 읽을 때도 율법으로 읽는 똑같은 실수가 벌어지는데 사람 중심에서 역사서와 종교 경전, 율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바리새인이 되는 것은 눈깜짝할 사이이다. 오늘날 수많은 이단들의 잘못된 교리와 카톨릭의 수많은 고해성사가 이 율법에서 못 벗어났음을 성도는 잊어서는 안 된다.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산상수훈 팔복으로 점철되는 성도의 삶 [내부링크]

(사 45:12)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사 45:5-8)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요 21:18) 내가

울지않는 자는 다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내부링크]

헬라어 성경에 나타나는 '애통(펜데오πενθέωG)'이란 성경에서 슬픔을 가리키는 9개의 단어 중에 가장 통렬하고 탄식하며 비극적인 슬픔을 나타내는데 항상 심령의 가난함을 동반한다. 성경에서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목도할 때 터져나왔던 것이 '애통(펜데오πενθέωG)'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 밖에서 통곡하는 그 울음. 내가 믿고 의지하던 예수가 죽었을 때 터져나오는 바로 그 슬픔. 요한계시록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때 세상에 속한 장사꾼들이 울고 부르짖었을 때 또 그 애통이 사용되었다. 자신들이 전부라고, 생명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질 때 애통이 나타났던 것이다. (요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목숨, 자기 생명이란 헬라어 원어로 ψυχὴν(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내부링크]

(요 3:1-5)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예수를 눈여겨보던 니고데모가 구원의 진리를 알고자 예수를 찾아왔다.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바리새인이기도 했던 니고데모는 그의 신분이나 재물, ‘승리한 백성’, ‘백성의 정복자’란 뜻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 관원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넉넉한 집안에서 자라 그야말로

뱀의 머리가 밟히는 성도의 삶 [내부링크]

(행 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고전 10: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 10: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고전 10: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이 땅의 택함 받은 성도의 교훈을 위해 주어진 성경은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광야 교회, 그러니까 지금 광야라는 세상에 던져진 교회가 우리인 셈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헐려야 할 육체의 성전 [내부링크]

공관복음서를 보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마치 일부러 세상과는 정반대의 방향, 그야말로 유대주의, 인본주의 한복판에서 죄인들과 어울리고, 또 성전에서는 장사하는 자들을 다 내쫓으시는 등 인간들이 가장 싫어할 법한 일들만 골라하셨다. 왜냐하면 성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 세상이 추구하는 일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요 2:13-16)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 당시 성전 안에서 소, 양,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구약을 보면 알다시피 소, 양, 비둘기 모두 제사 때 바치는 번제물들이었다. 한마디로 인간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번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