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kinosin43의 등록된 링크

 yukinosin43로 등록된 네이버 블로그 포스트 수는 20건입니다.

00_글을 시작하며 [내부링크]

글을 시작하며 내가 올해(2023년) 7월 중순쯤에 어쩌다가 어떤 학교의 설립 60주년 기념 앨범을 보게 됐습니다. 그것은 선정중고등학교와 관광고등학교의 ≪善正(선정) 60년사≫라는 책이었습니다. 올해는 2023년, 학교가 1950년에 설립된 지 73년째가 되는 해이니, 13년 전에 나온 책입니다. 선정 60년사 책 표지 책 속엔 학교 역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설립 동기 부분이 분명하지 않아 자칭 아마츄어 역사 연구가인 나의 궁금증을 무척 자극했습니다. 보통 사립학교라면 먼저 학교를 세운 훌륭한 설립자가 있을 것이고 육영사업에 대한 설립자의 어떤 뜻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계기가 된 사건이라든가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것입니다. 책속에는 설립자(아마 초대 이사장이 설립자이겠지만)의 생애에 대한 언급도 없었습니다. 설립자는 어떤 사람인가? 설립자에 어떤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책 속에 역대 이사장들의 얼굴 사진도 그 학교의 60년 역사를 자랑하듯 한 페이지를 가득

01_선정중학교(한양여상) 개교 그날(1) [내부링크]

선정중학교의 개교는 언제일까요? 선정중학교의 공식 사이트를 찾아가 확인해봤습니다. 학교 연혁 | 선정중학교 학교소개 건학정신 이사장 인사말 학교장 인사말 학교 상징 학교 교육 목표 학교 연혁 학교 현황 교직원소개 자매학교 찾아오시는길 홈 > 학교소개 > 학교 연혁 학교 연혁 sunjung.sen.ms.kr 1950.05.22. 한양여자상업중학교 설립 인가 개교 선정중학교 공식 사이트 서울특별시 서부교육지원청 사이트에서도 선정중학교 관련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특별시서부교육지원청 번호 학교명 설립별 설립일자 변경일자 104 경성가정여숙 사립 1940.10.10 103 경성농업실천학교 사립 1906.04.01 1945.05.30 102 경성상업실천학교 사립 1906.04.01 1938.03.23 101 경성중등공민학교 사립 1906.04.01 1933.02.22 100 경성중학교 사립 1967.10.15 99 경성중학교 사립 1967.10.15 1968.05.21 98 경창중

02_선정중학교(한양여상) 개교 그날(2) [내부링크]

오늘은 당시 신문기사를 알아보면서 좀더 상세히 '그날'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옛날 신문 기사 아카이브를 무료로 공개하는 사이트가 있어서 참 좋습니다. 내가 많이 이용하는 것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와 국립도서관이 운영하는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입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00년대 옛날 종이 신문 그대로~ 디지털 뷰어로 만나보세요. newslibrary.naver.com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www.nl.go.kr 그럼 오늘 이야기를 사작할게요~ 1949년 12월 31일에 새 교육법을 제정함으로써 기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재편성해야 했습니다. 광복 이후 학제의 변천 과정을 여기서 논하면 좋겠지만 나에게는 그럴 수 있는 여력이 없어서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갑니다. 아무튼 모든 중학교는 새 교육법을 기초로 한 신제 중학교 설립 인가를 문교부 장관한테서 받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高等校設置에 앞

03_선정중학교(한양여상) 개교 그날(3) [내부링크]

1949년 12월 31일에 제정된 교육법의 획기적인 점은 초등교육에 대한 의무교육의 실시였습니다. 1950년도 학기가 시작하는 6월부터 시행 됐는데요. 하지만 중등교육의 의무교육은 머나먼 꿈이었던 시대입니다. 당시 중학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모든 학생들을 수용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중학교가 많지 않아서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당시 신문에 실린 중학교 입학 시험에 대한 기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中等入學試驗 第一期五月十三―十七日 第二期五月十八―卄二日 금년도 서울에 있는 남녀 중등학교 입학시험은 一기 二기로 나누어서 시행되는데 一기는 五월 십三일부터 십七일까지고 二기는 십八일부터 二십二일까지이다. 그리고 二기는 같은 공립중학이면서 二부제로 교수하여 야간부를 설치한 덕수상업 경기공중(畿工) 성동중학 선린상업 등이며 一기 二기를 모두 시험문제로 출제할 것은 종래와 같은 어려운 문제를 떠나서 교과서에 의한 사고력을 중심으로 한

글을 시작하며 [내부링크]

내가 만초천에 대한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려고 한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블로그 기능들이 익숙해지지 못해 지금도 우왕좌왕하고 있네요. ㅋㅋ... 서울에 만초천이라는 안 보이는(?!) 하천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인터넷을 여기저기 찾아보고 다른 분들의 블로그 글을 보며 하루는 직접 현장에 가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때가 1년 5개월 전이었는데 찍은 사진을 그냥 컴퓨터에 놔두면 언제 사라질까봐 일단 사진이라도 올리자고 결심했습니다. 왜 블로그 글쓰기가 작심삼일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완성된 글을 올리려고 다른 메모 앱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도 글이 완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하~ 이러다가 계속 텅빈 블로그다, 안되겠다, 해서 사진이 많고 긴 글들을 작은 주제로 나눠서 조금씩 올리는 작전을 세워봤습니다~! 몇년 한국에 살았는데도 아직도 한국어 글쓰기가 어렵습니다. 단어도 알아야 되지만 막상 글을 쓰려면 헷갈리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햇갈리

04_학교사 이전의 학교사(1) [내부링크]

지난 회까지 3회에 걸쳐서 선정중학교(한양여상) 개교(설립)일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1950년 5월 22일에 개교했다는 그 한양여자상업중학교(한양여상)는 사실 그날 이전에도 존재했었습니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와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를 통해서 한양여상에 관한 옛날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재단 설립 인가를 받았던 1950년 4월 이전에도, 많지 않지만 한양여상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소개하는 기사는 1949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중학교 졸업식 소식입니다. 四千三名의 中等生이 卒業 금년도 시내 공사립 중등학교의 졸업생은 四천三명에 달하고 있는 바 각 교의 졸업식은 다음과 같다. (후략) 1949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 이 기사에 40여 교의 학교 이름이 졸업식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고, 마지막 부분에 '六月二十日 漢陽女商'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한양여상의 졸업식에 대한 짤막한 기사도 발견했다. 韓陽女子商業學校 第二回 卒業式

05_학교사 이전의 학교사(2) [내부링크]

성정여자중학교(현재 선정중학교)는 그 이름을 한양여자상업중학교로 한 시대가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화원여자경리학교였다는 것을 지넌 회까지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화원여자경리학교에 대해서 알아볼게요. 알아본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옛날 신문 기사 검색과 논문 찾기 밖에 없는데요...ㅋㅋ 해방 직후 미군정 교육정책에 대한 논문들을 잠깐 봤는데 서울시내에 있던 중학교 중에 '화원여경'이라는 이름이 있었던 것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원여경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논문은 아직 못 찾았습니다. 화원여경에 대해 신문에 실린 것을 몇 개 찾았으니 여기에 공유할게요. 먼저 1948년 신문에서 시작해서 1947년, 1946년,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갈게요.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17일자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자료 제공) 참고로 주소는 종로구 사직동 산 1번지라는 의미인데요. (실은 학교 소재지에 대한 역사 이야기도 나의 연구 대상인데....) 그 밑에

06_선정중학교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며(?!) [내부링크]

지금까지 선정중학교 연혁에 관해서 논했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경성법정학교 ---> 화원여자경리학교 ---> 한양여자상업학교 ---> 한양여자상업중학교 ---> 성정여자중학교 지난 번에 화원여자경리학교의 전신은 경성법정학교였다는 것을 밝혔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경성법정학교에 대해서 안 논할 수가 없는데.. 많이 고민했어요. (경성법정학교에 대해 깊이 들어가면 더 복잡해질 것 같아서...그래도 짧게라도 해야지...) 경성법정학교에 대해서 김자중 선생님이 논문( 『일제 식민지기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 사례연구 - 경성법정학교의 설립과 운영 -』) 속에서 자세하게 논하고 있어서 많이 참고가 됩니다. 그 논문 속 경성볍정학교에 대한 소개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경성법정학교는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였다. ‘사립각종학교’란 「조선교육령」에 규정된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사범학교, 전문학교, 대학 이외의 학교 중 「사립학교규칙」에 의해 인가된 학교라고 한다. 경

가을의 문턱에 서서 [내부링크]

서울시대 어느 버스 정류장에서(2023. 9. 6 아침) 9월 6일... 아침 출근길에 버스에서 내려 문뜩 눈에 비치는 거리 풍경에 초가을을 느꼈습니다. 음...내 인생도 이제 가을인데... 그러고 보니 내 머리에 왠지 쓸쓸한 바람이 스쳐가는 것만 같습니다. 지난주 거래처 사장님이 점심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탈모증상완화 샴푸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이것!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는데 바로 검색해서 기록해놓았다가 지난 일요일에 동네 마트에서 가격을 보니까 400g이 27,500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비싼 것을 확인한 후 집에 가서 쿠에서 주문했는데 어제 택배가 도착했네요. 구입한 것은 700g 것. 가격은 약 3만 원이었습니다. 나는 지성 두피용을 샀습니다. 닥터 그루트라는 이름의 유래를 알고 싶어서 공식 사이트를 찾아봤는데 그런 설명은 못 찾았습니다. '닥터'라고 하니까 그루트씨는 이 샴푸를 개발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이 샴푸를 쓰는 임상실험에서 머리카락이 생긴 첫째 사람일 수도

욱천고가차도, 너의 이름은 [내부링크]

만초천(蔓草川)은 일제강점기에는 '욱천(旭川)'이라고 했다. 욱천(旭川)은 일본어로 '아사히 가와'라고 하는데 '아사히'는 해석하면 '아침해'다. 만초천에 왜 '아침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지금은 자료도 없고 알 수가 없다. 같은 시기에 경성부(지금의 서울시)에 욱정(旭町:아사히 쵸/현재 중구 회현동)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거리 상 떨어져 있어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침해는 하루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희망'을 상징하기도 하다. 하지만 욱(旭)은 일제강점기의 일본군, 그리고 현재 일본 자위대의 깃발로 사용되는 '욱일기'를 연상시킨다. '욱천'이라는 이름이 해방 이후에도 적어도 그 고가차도가 건설된 시기까지는 그대로 사용되었던 모양입니다. 현재는 '욱천'이라는 이름은 안 쓰고 '만초천'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고가차도에만 욱천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의 지명이라 이름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들이 인터넷상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아직도 그대로다. 이제

07_박문서관 이야기(1) [내부링크]

이 연재는 처음에 선정중학교 개교 당시 상황을 살펴봤고 그 다음엔 개교 이전의 학교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이번 회부터는 말하자면 제3장이 될 것 같은데, 선정중학교 개교 당시 학교를 운영했던 박문학원과 예정수 초대 이사장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박문학원 즉, 박문서관(博文書館)이라는 서점 겸 출판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솔직히 선정중학교 60년 기념앨범 속의 학교 역사를 읽기 전까지는 박문서관이라는 존재조차 몰랐습니다. 그런데 잠깐 인터넷에서 검색해봤더니 꽤 크고...아니 일제강점기를 대표할 정도로 유명한 서점+출판사+인쇄소+종이무역회사였다고 하니 몰랐다는 수치심을 느낌과 동시에 나의 궁금증이 발동되었습니다. 박문서관은 학교 운영을 하다가 민성학원이라는 또다른 출판사(민중서관)로 경영권을 넘기게 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본업의 출판업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한국 출판 문화계의 전설이 된 거죠~. 학교를 일으켰다는 것은, 비록 그 당시에는 미미한 출발이었을지라도 70여 년

08_박문서관 이야기(2) [내부링크]

박문서관(博文書館)에 대해 자세하게 연구하고 설명한 것은 경희대학교 김종수 교수의 논문 「일제 식민지 문학서적의 근대적 위상 -박문서관의 활동을 중심으로」입니다. 이 논문에서 노익형의 가계와 그가 출판업을 시작한 배경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박문서관이 해방 후 1950년대에 육영사업을 시작한 것과 문을 닫게 된 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쉽습니다. 박문서관 창업주 노익형(盧益亨)은 1884년 5월 12일에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07년 그의 나이 23세에 남대문 감리교 상동예배당 앞(남대문통 4정목 69번지)에서 구멍가게 서적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자료: 지번구획입대경성정도(1936년) 김종수 교수의 논문이 다른 자료와 달리 훌륭한 것은 상동예배당 앞에서 책방을 시작했다는 그 배경에 대해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은 노익형은 상동예배당의 교인이었다고 하는데,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당시 애국지사들과 교유가 있었으며 그냥 신도가

서울시 옛 청사 옥상 하늘뜰에서 사진 찍기 [내부링크]

오늘 서울시청 근처에서 일이 있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무심코 서울시 옛 청사 앞 서울광장을 자나다가 옛 청사 입구의 서울도서관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옛 청사 건물이 지금 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나는 몰랐습니다. 서울시민이긴 하지만... 건물 위쪽을 보니 옥상에서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모습들이 보여서 나도 옥상에 올라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사람은 왠지 모르지만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어하는 습성이 있어요. 왜죠?! ㅋㅋㅋ...그냥 올라가보죠~ 위 사진은 엘리베이터 옆 안내판입니다. 5층이 옥상인데 하늘뜰이라고 합니다. 5층에는 옛 청사 흔적 전시실도 있었습니다.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요. 전시실을 가운데에 두고 양 옆에 하늘뜰이 있어요. 좌우의 하늘뜰은 연결이 안 돼 있습니다. 먼저 동쪽 하늘뜰에 나가서 사진 촬영! 신 청사의 물결이 나를 압도시킵니다. 서울광장이 한 눈에! 숭례문이 빌딩들 사이로 보입니다~ 옛 청사의 꼭대기에 피뢰침? 아담하게 잘 꾸며놨던 동쪽 하늘

만초천 성지 탐방 [내부링크]

지난 회에 욱천고가차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늘은 지난 회에 이어 욱천고가차도 밑으로 들어가 지상에서 유일하게 만초천을 볼 수 있다는 그곳을 찾아갔던 이야기입니다. 지도로 한번 그 위치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위 지도를 봐도 만초천이 잘 안 보이시죠? 만초천이 드러난 구역을 빨간색으로 표시해놨습니다. 지도를 보니 만초천의 한가운데 위를 경의중앙선이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찾아간 날짜는 2022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1년 5개월 전의 이야기네요. 거기는 만초천에 대해 연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찾아간다는 만초천의, 말하자면 '성지'라고 할까? 그런데 만초천의 그 구역만 안 덮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머리 속에 먼저 떠오른 나의 추측은 이렇습니다. 아마 여기만 만초천을 덮을 이유가 없어서가 아닐까. ㅋㅋㅋ... 덮으면 그 위에 활용할 공간이 생길 텐데, 별로 활용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든가, 아니면 아예 활용할 수 없는 곳으로 판단해, 덮으려면 공사비용이

원효대교 북단 교통섬에 세워진 만초천 안내판 [내부링크]

2022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욱천고가차도와 만초천 '성지'를 탐방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지난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욱천고가차도, 너의 이름은 만초천(蔓草川)은 일제강점기에는 '욱천(旭川)'이라고 했다. 욱천(旭川)은 일본어로 '아사... blog.naver.com 만초천 성지 탐방 지난 회에 욱천고가차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오늘은 지난 회에 이어 욱천고가차도 밑으로 들어가 지상에... blog.naver.com 용산전자상가쪽 욱천고가차도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난 후 만초천이 (지하에서) 흐르는 물줄기에 따라 전자상가를 원효대교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최종목표지는 만초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쭉 가면 원효대교 북단 부근, 성촌공원 가기 전에 또 하나의 길쭉한 공원이 있는데요. 그런데 그 공원 이름이 네이버 지도에도 카카오맵에도 표시 안 돼 있습니다. 위치라도 알려드리기 위해 네이버 지도를 올릴게요. 지도에 이름 표시가 없고, 카카오맵에는 아예 공원을 나타내는 녹색

'괴물' 은신처 만초천 탐방과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함 [내부링크]

2022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만초천 현지 탐방도 이제 마지막 지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만초천이 한강에 흘러가는(나중에 알았는데 평소에는 흐르는 물이 거의 없습니다) 그 지점입니다. 만초천교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이 블로그의 체크인 이 장소의 다른 글 청파로에 따라 용산전자상가를 지나 성촌공원을 잠깐 들렀다가 강변북로 위에 놓인 구름다리를 걸어 건너갑니다. 성촌공원 입구 저 구름다리를 건너야 됩니다. 엘리베이터도 이용가능합니다.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북쪽 방면 사진. 원효대교 밑으로 강변북로가 지나가는 모습. 구름다리 위에서 남쪽 방면 보고 찍은 사진. 이촌시범중산 아파트. 보기만해도 재건축 대상 건물... 위 사진을 보면 원효대교에서 갈라져 강변북로로 내려오는 고가도로 밑에 보이는 곳이 만초천과 만초천교입니다. 네이버 지도에는 만초천교가 검색되지만 거리뷰에는 제대로 표시가 안 되고 그냥 만초천교 위에 있는 원효대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려가보죠~ 만초천 출구(?!)와 만초천

그래도 만초천은 숨 쉰다, 숙명여대 입구 굴뚝 [내부링크]

서울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 10번 출구에서 나와 돌아서 숙명여대 방향으로 갈월동지하차도를 지나서 나오면 큰 굴뚝이 눈에 들어옵니다. 무슨 굴뚝인지, 밑에는 공장이나 소각장 같은 것도 없습니다. 요즘은 지도를 위성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요. 보니까 그냥 동그라미로만 보입니다. 당연하지만. ㅋㅋㅋ... 그냥 지도에는 표시가 없습니다. 최근 이 굴뚝의 주변에서 여러 사진을 찍어봤습니다. 이 사진은 올해 2023년 6월 9일에 찍은 사진입니다(3개월 지났네요 ^^;). 서울역 서부역에세 숙명여대 입구 쪽으로 청파로를 걸어가면서 찍었습니다. 요즘은 휴대폰 사진은 확대해서 찍어도 괜찮게 나오네요. 도대체 언제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 몰랐는데, 지난번 포스팅에서 소개한 온라인신문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님의 기사 중에 "주민들에 따르면 만초천의 가스를 배출하기 위한 굴뚝이라고 한다."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음~ 그렇구나... 그게 사실인가? 반신반의... 그러데 청파로에 따라 복개된

만초천 지류 다리의 흔적을 찾아 [소조천교 교명주 탐방기] [내부링크]

인터넷으로 만초천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작년(2022년) 기사인데 만초천의 지류에 놓여 있던 소조천교(小早川橋:고바야카와바시)에 대한 내용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소조천의 원래 한국어 이름을 몰라서 여기서는 일본 한자명을 한국어로 읽는 '소조천'으로 부르겠습니다. 소조천교 교명주가 확인됐다고 하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2022년 6월 21일에 보도자료를 공개한 기사였는데, 기사 제목은 '임진왜란 왜장 이름 딴 다리, '코바야카와교' 돌기둥 최초 확인'이었습니다. 다리 이름을 새긴 기둥을 교명주(橋名柱)라고 하는데 만초천의 지류 소조천에 놓여 있던 소조천교의 교명주가 지금도 도로변에 있다고 합니다. 경성휘보(1942년 3월호)에 실린 기록을 근거로 1926년 11월에 석교로 개축할 때 조성된 것이라고 자세히 설명해주셨습니다. https://www.minjok.or.kr/archives/126718 민족문제연구소의 뉴스에 관련되어서 또다른 뉴스가 없는가 해서 더 찾아봤더니 연합매

안성탕면 출시 40주년! 안성탕면체 폰트 사용 체험기 [내부링크]

추석인데 이런 것 포스팅해도 별로 반응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사는 대로 그 모습을 올리도록 할게요. ㅋㅋㅋ 폰트는 라면처럼(?!) 호불호가 뚜렷한 것 같습니다. 내가 즐겨 쓰는 폰트가 있고 남이 즐겨 쓰는 폰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폰트가 디자인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때로는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 구상에 알맞은 폰트를 찾는데 많은 시간이 소모되기도 합니다. 요즘은 미리캔버스 같은 것을 이용하면 폰트의 저작권을 걱정할 필요 없이 쓸 수 있어서 편리하죠. 나는 직장에서 미리캔버스보다 PPT 문서 작성을 많이 하기 때문에 가끔 좋은 폰트를 저작권 걱정 없이 쓰려고 지자체나 기업이 공개하는 폰트를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은 안성탕면체라는 폰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디자인을 하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면 사다가 패키지 문구에 낚였다 추석 전날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동네 마트에서 서성거리다가 라면도 사다놔야겠다는 생각에 진열되어

아카펠라가 좋은 이유 [내부링크]

'아카펠라'는 이탈리아어 'a cappella'에서 나온 말인데, 그것을 번역하면 '교회풍으로, 교회식으로'라는 음악형식에 대한 의미를 가진다. 현재 '무반주곡'의 뜻으로 널리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 아직 식지 않은 아카펠라에 대한 애정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에 일본 지방 대학교 혼성합창단 동아리에서 청춘의 시기를 보냈다. 단원들이 남녀 25~30명 정도 있었는데 합창하기에는 결코 많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인원수였다. (한 파트 당 6, 7명) 주로 아카펠라 곡을 즐겨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저의 아카펠라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지금은 아카펠라 곡을 부르는 기회는 전혀 없지만 말이다. 요즘에 블로그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음악, 합창, 아카펠라를 주제로 하여 저의 생각을 글로 남기기로 했다. 먼저 오늘은 아카펠라가 좋은 이유부터 생각해 본다. 음악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가 아닌, 노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야기다. 다음 3가지로 정리하여 말하겠다. 아